공간에 말을 걸어보세요

호텔심리학 13

by Wendy An

베를린은 달콤쌉싸름하다. 거닐고 누빌수록 달큰하면서도 쌉싸름한 회색빛이 감돈다. 그 회색빛이란 게 먹구름을 닮은 잿빛이 아니라 세련되고 멋진 도시에서 내뿜는 도회적인 빛깔의 색이랄까. 고르키는 베를린을 닮았다. 누비고 거닐기 전엔 베를린스러움이란 게 무언지 잘 몰랐지만 떠나려 하니 고르키야말로 베를린을 이모양 저 모양으로 접고 접어 공간에 넣어준 것만 같더라. 따스한 무채색의 향연, 안온한 삶의 루틴, 시크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찬란한 예술적 열망, 큼직한 여유와 세련된 매너, 바우하우스적 실험 정신 그리고 과감한 포용까지. 베를린 삶의 풍경과 베를리너들을 유심히 관찰하니 베를린스러움과 고르키의 닮음새를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호텔이 있을 테지만 유럽의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지키는 원칙과도 같은 위시리스트가 있는데 바로 그 도시에서만 가볼 수 있는 로컬색 짙은 부티크 호텔을 면밀히 찾고 그곳에서 사나흘 이상을 머무는 것이다. 그 도시, 그 호텔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정취나 매력이 깃든, 과거와 현재를 품은 호텔이 안겨주는 즐거움과 희열은 확실한 행복이다. 늘 떠날 때 즈음 발견하게 되는 그 도시 '스러움'이란 것이 발견의 기쁨이기도 하고 훗날 그리움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 스러움을 지닌 호텔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바로 내 여행이다.


로브에도 슬리퍼에도 주머니에도 고르키가 있다. 자꾸만 그가 흘깃거리며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아 재미지다. 마치 영화처럼 정말 그가 말을 걸어온다면 얼마나 흥분될까. 믿을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나란 사람 나름 차분하게 그 멋진 순간을 즐기지 않을까. 우린 분명 비밀스레 담소를 나누겠지. 물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누구인지, 고르키 호텔에 담긴 재미있는 스토리는 무엇인지, 베를린이란 어떤 곳인지 쉴 새 없이 묻고 싶다. 로브를 입고 궁극의 포근함에 감겨 스리슬쩍 해 본 엉뚱한 생각. 한참을 잊고 지내왔는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휘발돼버렸던 엉뚱한 생각과 질문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아, 여행은 추억해야만 한다. 아니 그런가?



베를린은 뭐든지 (키가) 크고 길다. 침대도, 테이블도, 의자도 그리고 욕조도. 북유럽에서도 욕조에서만큼은 이런 굴욕 안 당해봤건만 글쎄, 욕조에 머리를 누이고 사르르르 녹아내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슬며시 눈을 감는데 발을 누일 데가 없다. 그러니까 끄트머리에 발이 닿지 않는다?! 하, 게르만이여! 두꺼운 타월을 베개 삼아 더 과감히 발을 뻗어본다. 가까스로 닿긴 하지만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재밌으면 됐지 뭐, 굴욕엔 늘 유머가 깃드는 법이지, 암. 굴욕의 순간조차도 소중하고 즐거운 게 여행이란 것 아니겠는가. 강한 긍정은 곧 강한 부정이라지, 훗. 뜨끈함에 마음까지 녹아내리니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싶다. 공간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스폿에 자리한 욕조에서 목욕을 즐기며 베를린을 한껏 기대하는 이 마음이란.


감겨둔 두 눈을 슬며시 뜨고는 고요히 공간을 바라본다. 널찍한 블랙 키친에 은은한 조명 빛이 비치는데 마치 깊은 밤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며 노니는 반딧불이의 발광 같기도 하다. 구석진 한 켠에 무심히 놓인 검은색 스툴이 맘에 든다. 키친 조리대와 이어지도록 상판을 연결해 책상처럼 만들어진 귀여운 공간. 글을 써야만 하는 분위기를 내뿜는다. 꼭 저 스툴에 걸터앉아 베를린과 나를 끄적여야지, 생각한다. 널따랗고 높은 침대 발치에 백 년은 됐을 법한 보물상자의 모양새를 지닌 커다란 궤짝이 있다. 인테리어의 일부 이리란 것을 알지만 상상력과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이런 오브제, 전체 공간과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 오묘한 오라(aura)를 뿜어내는 저 물체의 실체가 과연 무얼까 계속 생각한다. 아쉽게도 비어있는 수납공간에 불과했지만 즐거웠으니 족하다.



아늑함이 마음으로 밀려든다. 이곳에서라면 베를린에서의 일상은 어떨까, 그려본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디든 두 발로 거닐 때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겠지만, 때로는 호텔 공간에서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 더 충만해지는 찰나의 순간들도 분명 있음을 알게 됐다. 그렇게 내 상상 속 스토리가 내가 다다르는 곳마다 더해질 때 마음속에선 더없이 충만한 여행이 펼쳐진다. 사람에게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여행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가 보다. 두 발이 어딘가로 향하기 전, 호텔에서 내 멋대로 그려본 스토리가 그 여정의 진짜 시작 아닐까. 과연 잠들 수 있을까 싶지만 밤새 공간을 여기저기 바라보고 파헤치며 친해지는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 계속 말을 거는 한 결코 잠들지 않을 것만 같은 고르키의 매력 벗 삼아 길게 누리는 베를린의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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