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14
며칠 동안 꼭 새벽 3시였다. 과연 다 잔 건가 싶어 갸우뚱 거리며 일어나 보면 밖은 아직 어두컴컴했던 그 시간. 아무리 베를린을 마음껏 누비며 충만한 하루를 보냈어도 꼭 눈이 떠지던 그 시간. 다시 잠들려면 족히 한 시간은 필요했던, 보너스처럼 얻어낸 것만 같던 그 적요했던 시간이 종종 그리워진다. 아마도 그 순간의 배경이 고르키였기 때문이리라. 새벽 3시에 진정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하며 공간을 둘러본다. 찬기운이 일찌감치 찾아왔던 10월 베를린의 새벽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기엔 차(茶)가 제격이었다. 매일같이 정성스레 가득 채워주던 여러 종류의 소포장된 찻잎은 새벽의 듬직한 벗이었다. 향긋한 홍차를 우려 투박한 브라운 슈거 한 조각 녹여 마시노라면 맛과 향에 그리고 그윽한 붉은 색감에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더라. 가득 채워준 찻잎들 중에 경남 하동 녹차가 있어 어찌나 신기하고도 반갑던지. 다음 날 새벽 3시는 우리 녹차의 맛과 향 벗 삼아 고요하고도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
찻잎이 서서히 따스한 물에 색을 드리우며 둥둥 떠 있다가 차례로 하나씩 가라앉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새벽의 한 중간에 잠이 깬 것도 좋고, 차를 앞에 두고 조금씩 홀짝 거리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으니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번진 미소. 이 생각을 놓치지 않고 한 번은 할 수 있어 감사한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잠이 다시 찾아올 게 분명하니 짙은 고소함과 쌉싸래함이 그리울 땐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도 벗 삼았다. 캡슐도 매일 종류별로 가득 채워주는데 이 아무리 숙박비에 포함된 서비스일지언정 좋은 기분을 막을 길이 없더라는. 고르키는 아마도 알고 있었겠지, 여행자들이 깨어나곤 하는 새벽 어느 즈음에 차와 커피가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란 걸. 새로 사귄, 그런데 나를 빠르게 파악하곤 섬세한 배려와 애정을 건네는 센스 넘치는 친구 같은 공간이다, 이곳. 곁에 이렇게 센스 가득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공간을 채운 공기에 컬러가 더해지는 것 같지 않나. 함께 기분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요 움직임에도 활력이 돌고 그 배려에 보답하고픈 마음에 내 센스도 온 힘 다해 그러모아 뿜어내고픈 건강한 욕심도 들고 말이다. 공간이 이렇게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게 어떤 매력인지는 매력적인 공간과 직접 만나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 그러니 떠나자, 우리. 어딘가 나만의 공간이 되어줄 그곳을 찾아서.
새벽 3시에 내가 이곳에 있고, 베를린을 여행 중이며, 무엇보다도 그 사실에 감사하고 있음을 확인한 덕분이겠지. 몇 시간 더 잠을 청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 새로운 기분이 찾아든다. 흐리지만 자꾸만 정이 가는 베를린 아침 창밖 풍경을 잠시 바라본다. 이슬을 머금은 듯한 질감의 구름으로 뒤덮인 은회색빛 하늘이 더 베를린스러운가도 싶고. 찬바람에 잠이 다 깨버릴라 싶어 금세 창문을 닫는다. 눈도 다 비비기 전 침대 곁 욕조로 스윽 다가가 물부터 받는다. 모닝커피 재빠르게 내려와 욕조 곁에 두고는 물 온도를 체크하고선 어여쁜 에메랄드빛 입욕제를 띄우니 잉크가 물에 번지듯 요리조리 흘러 다니다 금세 사라지는 모습에 만면에 가득히 머금어지는 미소. 이 미소 참 귀한 미소일 터.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가 없는 종류의 미소 아닌가 말이다. 미소 사세요, 베를린 고르키가 스며든 이 즐거운 미소.
몸을 반쯤 담그고 정신도 커피로 반만 깨워본다. 완전히 깨어날 수 없어, 라 생각한다. 뭐든지 느리게 하겠어, 라 다짐했으니. 좌르르 윤기가 흐르는 듯한 물결 사이로 찬찬히 들어간다. 팔다리를 스르르 풀어 힘을 빼고 며칠 째인지도 모르겠는 어느 날의 베를린의 아침을 만끽한다. 어떤 생각도 어떤 마음도 다 괜찮은 기분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며 일하고 있는 듯한 시간과 고르키의 컬래버레이션을 제대로 누려보는 거다. 추억에 빠져들자니 문득 팝업 되는 아이디어. 누군가 내게 유럽 어느 도시의 호텔 추천을 부탁해온다면 호텔 추천과 더불어 공간과 나 사이 사귐이 오고 가는 '호텔에서의 하루'를 설계해주는 편지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하는, 그런 수줍은 생각. 당신이 원한다면 난 기꺼이 호텔에서의 하루를 느슨하면서도 충만하게 설계하는 원데이 디자이너가 되어 보겠어요.
여행이 좋은 백이십만 가지 이유 중 하나가 홀연히 떠올랐다. 한 단어로. 그것은 바로 '반전'. 무엇에 대한 반전일까? 삶에서 한 번쯤은 아니 두세 번쯤은 꿈꿔보는, 은밀히 상상해보는 게 있다면 인생 반전이란 것 아닐까.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세상이 변하든 내가 변하든 낯선 삶이 시작되고, 그 삶의 모양이 사실은 썩 긴 시간 동안 내밀하게도 바라왔던 그림으로 펼쳐져 당황스럽다가 행복했다가 어리둥절 거리다 잠에서도 꿈에서도 깨 본 적 있더랬지. 현실이 늘 절망적이지도 우울하지도 않지만(가끔은 활기가 없다), 현실은 녹록지 않기에 감춰둔 반전을 향한 욕망을 바로 액션!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야지. 그래서 1년에 한두 번쯤 여행을 통해 무엇에서든 반전을 꾀하다 못내 웃어버리는 것, 그게 묘미라면 묘미지. 그 묘미가 가득하여 반전과도 같은 즐거움과 이름 모를 영감을 안겨주는 공간이 바로 유럽 도시 곳곳의 '중정'이다. 볼 때마다 왜 새롭고도 매력적인지. 그야말로 볼매 중의 볼매로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그리고 밤에도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쳐본 적 없던 공간이 고르키의 중정이다. 실 주거 공간인 아파트 건물들과 이룬 네모난 중정에 들어서면 각양각색 오밀조밀한 모자이크 돌바닥을 만난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데 철제 계단과 창가에 넝쿨이 회회 감겨 있는 모습에 시선이 옮겨지니 푸르고 예쁘다를 연신 내뱉는다. 푸르고 예쁜 사람이 되고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 자연의 색을 닮은 사람. 하늘색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땅의 모습. 노란 꽃이 한아름 올려진 조그마한 목재 테이블 곁 벤치와 의자가 정겹다. 베를린의 하늘과 땅 차이는 이런 것인가, 훗. 귀여운 색감의 쿠션과 방석은 느낌이 참 따스한데 앉아서 잠시 머물다 가지 않을 방도가 없다지. 덕분에 여행자의 속도가 더디어지는 것 같아 차라리 고맙다. 잠시 머묾의 미학은 이렇듯 공간이 만들어주누나. 공간이 말을 걸어오는데 모른 척한다면 아무튼 그것은 유죄. 항상 중정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던 게 어찌나 즐겁던지. 흘긋 흘긋 건네던 내 눈빛을 그곳은 읽어냈을까. 혹여 내가 놓친 그곳의 화답은 없었을지. 재미난 상상이다.
어쩐담, 그리움이 밀려온다. 고르키의 메인 로고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과 콧수염의 미스터 고르키다 보니 고르키란 공간도 정말 사람 같다. 공간을 추억하는가 하면 어느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으로 다다르니 말이다. 더도 덜도 않고 고르키는 베를린의 지금을 보여준 곳이라 생각했다. 부러 드러내진 않았지만 분명히 근간을 이루었을 오래된 베를린의 이야기와 초석 위로 켜켜이 쌓였을 여러 겹의 베를린 중 오늘을 만난 것만 같은 고르키. 그 오늘의 베를린을 덤덤하게 약간은 모던하게 공간으로 느끼게 해 준 덕분에 베를린의 과거와 미래를 마음대로 그려볼 수 있었던 특별했던 곳. 그곳과 교감을 나눈 사귐의 시간을 가진 나는 이제 그 전과 후로 여행 인생을 나눠야 하지 않을까. 솟아오르는 아드레날린과 노곤함이 충돌하는 바람에 둘러볼 틈이 없었던 체크인 때와는 달리 체크아웃하는 동안엔 리셉션룸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고르키 공간 중 가장 작지만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었으니. 고르키의 모던함은 무엇인지 이곳에서 생각의 타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베를린스러운 블랙, 그레이 색감의 배경에 오래된 베를린을 닮은 따스한 패턴의 오브제와 디테일이 스며들어 결국엔 편안함을 자아내는 곳이랄까. 이제 막 도착한 이들에게만 설레고 따스한 곳이 아니었다. 고르키는 떠나는 이들에게도 아낌없이 온기를 건네주었다. 그 온기가 다 식기 전에 다시 연이 닿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