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16
살면서 한두 번쯤은 만나게 되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지, 그것은 바로 진입 장벽. 삶의 여러 지점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물리적 환경에서 마주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관계에서도 만나게 되는 높고 낮은 그 벽. 왜 이리 달뜬 벽 타령인고 하니, 머물렀던 동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듯싶지만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그 어떤 심리적 장애물이나 벽을 마주한 적이 없었던 호텔 중 단연 기억에 남는 곳이 맥스 브라운이기 때문이다. 호텔로서의 최소한의 존재감, 여행자에게는 최대치의 자유가 드리워진 그런 곳이랄까. 호텔 관계자들이 차지하는 물리적인 공간 구성이 최소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건 마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묘하게 존재하는 그들. 서울 어딘가의 주차장에서 소리 없이 순식간에 나타나시는 주차 정산 요원들이 떠오른다. 이들도 그들도 모두 프로이긴 마찬가지일터. 심리적으로 그어진 선이 없으니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이 자유롭게, 리드미컬하게, 둥두둥둥 떠다니는 동선이 가능한, 흥미로운 공간이다.
유럽 어느 조용한 도시 교외지역, 화려하진 않지만 어여쁘게 꾸며져 있는 이웃집 정원으로 들어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하게 되는 맥스 브라운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리셉션은 정면에 보이는 큰 테이블 단 하나다. 어느 곳으로도 통행이 가능한 완전 개방형 리셉션이 무척 인상적이었지. 그 바로 뒤편엔 어느 때든 출입과 통행이 자유롭도록 설계한 듯 양쪽으로 뚫려 있고 열려 있는 세븐 노스(Seven North)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는데, 누구든 반드시 흘낏 바라보게 된다. 의도된 전략이라면 기분 좋게 기꺼이 넘어가고픈 센스다. 문턱이 낮은 공간이란 곧 개방성과 친밀감을 지닌 곳이겠지. 아니, 문턱이 아예 없는 것이란 게 더 정확하다. 누구나 오라며 따스한 시선으로 손을 건네는 듯한 온기와 저곳에 있을 즐거운 내 모습을 금세 상상해보게 되는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매력 마력 마술 뿜뿜.
초록이 무성한 호텔의 곳곳을 드나들 때마다 눈과 마음에 찾아오는 편안함이 곧 이곳이 지닌 대표적인 색깔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즉 조화롭지 못한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오라(aura)를 잔잔히 발산하는 분위기를 가진 곳. 그러니 너도 찬찬히 이곳에 스며들라, 라며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그래, 서두를 것도 미룰 것도 없을 그 궁극의 밸런스. 맥스 브라운의 브라운이 자연과 나무의 빛깔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을만치 호텔은 마치 건축과 인테리어로 숲을 재현시켜놓은 것만 같다. 자연이 인간에게 안겨주는 특유의 포근함을 이곳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었는데 비단 공간만이 지닌 매력이 아닌 맥스 브라운의 사람들에게서도 풍기는 매력이 있더라. 경직된 유니폼 대신 청량한 에이프런을 두른 편안한 옷차림, 여유로운 말과 몸짓, 친근한 미소와 친절함으로 밀도를 가득 채우는 멋진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바라보고 싶었던 내 마음속 수줍은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분명 즐겁게 일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제이콥을 잊을 수 없지. 환한 미소와 궁극의 차분함을 지닌 그는 모자란 내 독일어를 불굴의 인내심으로 끝까지 기다리며 들어주었고, 무려 연습까지 시켜주었으며, 우산을 빌려주고, 택시를 불러주고, 공간 곳곳을 소개해주고, 출퇴근길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 땐 오래된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주었다. 단 며칠이라도 제이콥과 친구가 되지 않을 방도가 없다. 공간과 제이콥의 안정적인 관계가 마치 내게 투영된 것처럼 그 덕분에 맥스 브라운과 나의 관계 맺음도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닐는지. 비엔나를 추억하는 누군가의 이름이 하나씩 쌓여 간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자 행복이다. 이네스에 이어 제이콥까지, 다음은 누가 될까?
어느 날 아침 비밀 정원에서의 생각. 우아한 커피하우스의 도시 비엔나. 시간을 잘게 쪼개어 멜란지(Melange)와 아인슈패너(Einspänner)를 틈틈이 마셔주고, 피로가 살짝 찾아오는 나른한 오후 서너 시 즈음엔 브랜디와 크림의 조화가 환상적인 비더마이어(Biedermeier)를 마시며 쉼을 가지면 더 바랄 게 없는 하루가 되는, 커피를 닮은 아름다운 도시! 발길 닿아 보고 느끼고, 한껏 누리고픈, 오랜 세월을 머금은 커피하우스가 워낙 많아 행복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비엔나 아닌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어느 카페로 향해 어떤 커피를 마시고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끄적여 두었을 만큼 호텔에서의 조식은 전혀 옵션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감각, 나의 마음이란 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도 같은가. 맥스 브라운 호텔의 다이닝 공간을 바라본 순간 바로 다음날 아침의 계획을 변경, 홀리듯 빨려 들어갔다.
각각의 색은 너무도 익숙하고 편안한데 공간에서의 색의 조합은 사뭇 낯설고 새롭다. 익숙함과 익숙함을 한 데 섞어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새로움 그 이상이다. 잠들어 있던 감각 하나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군. 에메랄드빛 그린 컬러의 차분한 평화로움에 살며시 끼어든 시크함 가득 코발트블루가 펼치는 뜻밖의 아름다움. 호텔을 닮은 브라운 컬러의 원목, 파스텔톤의 부드러움이 포근한 패브릭, 넝쿨처럼 연결돼있는 구릿빛 프레임과 조명이 사이사이 채워져 각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따로 또 같이 만들어 내는 조화가 너무나도 비엔나스러운 공간을 누비며 만끽하는 조식의 향연이란!
그래, 비엔나에서의 아침은 멜란지로 깨워야 한다. 포슬포슬한 우유 거품 아래 그윽이 펼쳐지는 진하고 부드러운 검은 호수. 왜 이곳은 모든 것이 비엔나를 닮았는가. 멜란지를 마시는 건 곧 비엔나를 마시는 것과 같다. 한 모금 이후 또 한 모금의 맛과 향이 다르게 펼쳐지는, 끝을 알 수 없는 매력. 보슬거리는 거품은 공간과 나의 첫 교감인 듯싶고, 진한 향이 감도는 부드러운 목 넘김은 드디어 마주 잡은 비엔나와 나의 두 손 온기 같구나. 아직까지 느껴지는 비엔나 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