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이 맺어준 인연, 호텔이 부린 마법

호텔심리학 17

by Wendy An

지지직 거리는 기분 좋은 바늘 소리로 시작해 루이암스트롱의 블루스가 흘러나오는 어느 한가로운 오후, 어느 어여쁜 호텔룸 창가. 방마다 귀여운 턴테이블이 있는 덕분으로 레코드샵 알트 & 노이(ALT & NEU)에서 보물찾기 하듯 득템한 루이 암스트롱과 마일스 데이비스를 듣는 호사를 누리는 순간, 잔잔한 행복감이 피어난다. 비엔나니까, 맥스 브라운이니까 싶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음악이 다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제시와 셀린의 비포 선라이즈 숨결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듯한 그곳에 다녀온 게 너무나 보람찬 나머지 자화자찬과 콧노래가 절로 나오더라. 오전 동안 내린 사랑스러운 비는 창밖 세상을 더 짙은 초록의 향연으로 만들어주었네. 살며시 내다보니 새가 두 날개를 힘차게 내젓는 것처럼 푸르름이 공기 중에 퍼덕인다. 누군가의 마음을 참 닮은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차분한 브라운 컬러의 테이블 위 사이좋게 큼지막한 티백 하나로 투박하게 두 잔을 우려낸 루이보스티는 색이 참 곱다. 한 모금 두 모금 따스함을 벗 삼아 몸과 마음을 툭 늘어뜨리고 나니 일단은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궁극의 만족감이 느껴진다. 찰나의 기쁨을 오랜 세월 간직하려는 소망을 담아 마음속 깊이 이 순간을 사진 찍어 둔다. 쉼이란 게 이토록 적극적이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도 함께 기억하련다. 그러곤 낮잠에 든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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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어스름, 아늑하고 푸르른 맥스 브라운의 로비 한 켠 벤치에 살포시 앉아 굵어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엄선해서 고이 모셔온 블랙 롱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 오랜만에 정성스레 해본 메이크업까지 갖추고 몸가짐은 짐짓 긴장이 깃든 듯하지만 마음엔 설렘 잔뜩이다. 오매불망 기다려온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를 보기 위해 아름다운 빈 국립 오페라극장으로 향하려던 참이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중년의 한 커플이 호텔 입구를 분주한 걸음으로 들락날락 하며 번갈아 내게 눈빛을 건네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뭘까. 괜히 수줍어 우버는 언제 오나 하며 앱만 뚫어지게 들여다보는데, 호텔 밖 벤치에서 이들과 먼저 조우한 짝꿍이 들어와 말해주길 암스테르담에서 온 이 부부도 라 트라비아타를 보러 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니 자전거를 타고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려던 참에 우리의 복장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강렬했던 눈빛 세례가 그제야 이해가 되면서 서슴없고 친근하게 악수와 인사를 건네 오는 그들과 금세 환한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한껏 차려입은 건 이들도 마찬가지인데 자전거를 타려 했다니 정말 너무 멋지지 않은가. 결국 그들은 우비를 호텔 측에 맡기고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우버에 동승하기로 하여 함께 기다리는데 체증이 심한 시간인지 도통 도착이 요원해 보여 우리의 구원투수 제이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했다. 제이콥이 불러준 택시는 2분 만에 달려왔고 이렇게 넷은 함께 택시에 올라타 금세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어깨를 맞대니 정말 더 친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무얼까.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Zum Staatsoper, bitte!(오페라하우스로 가주세요!)를 나도 모르게 외쳐 버렸다. 독일어 연습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일단 뱉어내고 보는 습관 때문(덕분?)이었는데 그 한마디에 급기야 이들 부부는 독일어로 이런저런 말을 빠르고 크게, 그리고 유창하게 걸어오는데 압도된 나머지 겨우 왕초보란 말 한마디밖에 건넬 수 없었다.


유쾌하고 유능하고 재미있는 듯한 이 부부! 아내분의 이름을 기억하는데, 부르면 아름다운 사운드가 나는 미리암(Mirijam)이었다. 미리암과 남편은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네덜란드 사람들로 무려 4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몇 마디 부탁을 했더니 주저 없이 마치 화음을 넣고 노래를 하듯 들려주었는데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럽더라. 택시에서 서라운드로 듣는 라이브 4개국어란!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던 중 미리암이 핸드폰을 달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자기 번호를 입력해주며 오페라가 끝나고 혹 함께 식사나 칵테일 한 잔 하고 싶으면 연락을 달라며 수줍게 미소를 건네 왔다. 낯선 이들을 향해 이토록 밝고 적극적이고 또 귀엽기까지 한 제스처를 보인 이 부부를 여전히 즐거이 추억한다. 정말이지 유쾌 상쾌한, 짧고도 강렬했던 동행이었다. 서로 번호를 딴(?) 사이가 된 우리는 도착 후 즐거운 시간 보내길 서로 기원하며 각자의 좌석을 찾아 헤어졌고 그들의 미소와 염원대로 환상적인 오페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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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했던 오페라와 샴페인 시간을 뒤로하고 맥스 브라운에 돌아 오려니 비는 말끔하게 그쳐있고, 다시 비엔나는 맑고 쾌청함을 안겨주며 우리를 반겨주더라. 늦은 저녁식사 겸 맥스 브라운에서의 마지막 밤을 한껏 누리고 즐길 겸 매일 밤 힐끗 볼 때마다 활기와 즐거움이 가득해 보이던 맥스 브라운의 레스토랑 세븐 노스로 향했다. 자리를 안내받고 앉는데 우연히 눈길이 닿은 바(bar) 자리 쪽으로 좋은 풍경이 보이더라는. 미리암 부부가 이미 자리를 잡고 칵테일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호텔 입구에서 우연히 만나 다시 레스토랑에서도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이 인연은 가히 맥스 브라운이 맺어준 재밌는 인연이로다. 서로를 바라보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부러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우리도 우리만의 오페라 후 열띤 대화의 시간과 맥스 브라운에서의 마지막 밤을 실컷 만끽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우리들 간의 인연은 맥스 브라운이란 하늘 아래서 자연스레 유유히 흐르도록 두기로 한다. 아마도 그들도 우리를 본 듯했지만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같았으리라. 여행자의 마음은 여행자가 알아준다고나 할까, 이심전심. 여행을 마친 이후로 미리암과 나는 문자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암스테르담과 서울의 여행을 가이드해주기로 염원을 담은 약속도 하고.


주위를 한 번 쓰윽 둘러본다. 투숙객들보다는 로컬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듯한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던 걸까. 분명 공간 전체가 시끄럽진 않은데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곳곳마다 활기가 넘쳐흐른다. 퇴근 후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럴 땐 내가 이방인이란 게 더 좋더라. 역시 저들에게도 맥스 브라운은 문턱이 없고 열려 있고 편안하고 친근한 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사람들은 레스토랑 직원들인데, 아무렴 일에 혼신을 다하고 프로페셔널한다 한들 이토록 신나고 즐겁게 일을 한다고? 고무적인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의심에 사로잡힌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단 한순간만 보고 섣부른 결론을 내릴 순 없겠지만 두어 시간 동안 이들을 바라보고 이들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여행자이자 이방인인 우리가 즐거웠으니 이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활력과 에너지 가득하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인지 맥스 브라운의 직원 버전 비밀이 아직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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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노스의 대표 메뉴로 명성이 자자한 구운 컬리플라워가 테이블에 턱 하니 놓인다. 매니저가 꽃다발처럼 들고 와 플레이트 없이 주는데 너무 맘에든 나머지 작은 탄성을 질렀다. 버릴 게 단 한 조각도 없는 이 엄청난 음식 앞에 무려 약간의 신성함까지 느껴지더라. 버터와 소금 외엔 온전히 컬리플라워 맛만 정직하게 느껴지는데도 여러 가지 감칠맛이 입 안 가득 도는 듯한 신비로움. 맛과 향이 역시 일품인 어여쁜 칵테일과 오스트리아 로컬에서 만들었다는 위스키까지 곁들이니 미리암 부부와의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오페라까지 이어진 꿈결처럼 흐르던 하루를 돌아보는데 행복함은 물론이지만 젊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건강한 체력과 젊은 정신을 유지해야 이런 순간들을 계속 만나게 되지 않을까란 소망과 의지를 품고 조용히 마음 한 구석에서 결의를 다지던 순간이다. 이어서 맛본 마르게리따 피자로 달아오른 식욕을 채우며 지난 며칠의 비엔나를 맛깔나게 추억한다. 저 멀리 오픈 키친에선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일하고 있다. 저들의 즐거움이 세븐 노스 공간 전체에 공기처럼 채워진다. 그 공기를 느끼며 마시고 있는 나와 이 많은 사람들이 즐겁지 아니할 도리가 없지. 그루브를 멋지게 타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함께 몸을 흔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아 이놈의 수줍음 정말 어디다 갖다 쓸꼬. 사실 나도 몰래 그루브를 타고 있었지, 아무도 모르게 살짝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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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브라운은 비엔나다. 비엔나 속 맥스 브라운에 머물렀던 것이지만 그곳 내부 세상엔 내가 만난 여러 모습의 비엔나가 있었다. 우아하고 차분한 도시, 자연과의 친밀한 푸르름, 사람들의 여유로운 움직임과 미소, 커피와 음식의 향연, 조용하고 차분한 공간미와 장벽도 경계도 없는 개방성까지. 세븐 노스 레스토랑을 들어가는 길엔 테이블장 칸칸이 로컬에서 수확한 노랗고 빨간 토마토가 놓여 있다. 누구든 지나다니면서 먹을 수 있도록 깨끗이 씻어 두었다는데 기대 이상의 단맛과 촉촉함이 일품이라 감동하며 먹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훈훈해졌다는 것. 호텔이 내게 마음을 활짝 열어주니 나도 비엔나에 더 활짝 마음을 열게 되었다랄까. 호텔은 그 도시의 축소판이자 그 도시를 때때로 대변해주는 곳이어야 함을 이곳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고작 나흘간에 불과했지만 단 한 구석도 남김없이 내 마음 문을 모조리 열어젖힌, 내게 찾아온 맥스 브라운의 매직. 그 마법 같은 순간에 또 뛰어들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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