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첫인상에 숨겨진 온갖 매력의 향연

호텔심리학 19

by Wendy An

흰색, 하얀색, 순백색 그리고 화이트. 그러고 보니 이름도 제법 많은 이 아름다운 빛깔이 내게는 오랜 세월 조금 부담스럽고 버거운 색으로 여겨져 왔다. 워낙 털털하고 덤벙대는 성정을 지닌 바람에 흰색 옷을 입으면 늘 사단이 나고야 마는 서글픈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얀색은 뭐랄까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겨 나는 색이다. 호텔 알렉산드라가 지닌 공간 전체의 색은 화이트다. 그 화이트는 도도하고 시크한 느낌에 짐짓 조금 쌀쌀한 기색이 엿보이기도 하며, 극강의 차분함과 고요함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색이랄까. 그야말로 말이 무어 필요하냐며 침묵을 권하는 짙은 화이트. 그저 말이 아닌 마음으로, 감각과 감정으로 교감을 나누자며 나를 그윽이 설득시키는 것 같더라. 그 설득의 유혹, 거부할 수 없더랬지.


알렉산드라. 호텔을 떠올릴 때마다 누군가 사람을 추억하는 기분이다. 얼굴이나 목소리는 없이 실루엣 형상만이 하얗게 눈앞에 아른거리는 몽환적인 추억이랄까. 그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몸가짐에 새하얀 옷을 즐겨 입으며 주로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 표정에서 멋이란 게 그득 쏟아져 내려 주워 담고 싶은 그런 사람. 깊은 산속 호숫가의 적막처럼 과묵하지만 광채가 도는 눈빛으로 모든 걸 말하려는 사람. 예사롭지 않은 차가운 첫인상에 다가가기 쉽지 않지만 찬찬히 그리고 자세히 지켜보고 들여다보면 그만의 언어로 나를, 모두를 따스히 환영해 마다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정취가 깊고 은밀한 사람. 있는 그대로의 알렉산드라를 마주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그토록 닮고 싶은 사람의 표상이 반영된 기억인가 보다.



알렉산드라의 곳곳엔 화이트 바탕에 은은히 피어나는 푸르름이 있다. 이름 모를, 고운 자태의 유니크한 식물들의 향연이 층층마다 제각각의 개성을 발산하며 펼쳐지는데, 이건 마치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알렉산드라가 영롱하게 반짝이는 에메랄드 보석을 차고 있는 모습처럼 우아하다. 단아한 조명 빛에 보석의 반짝임이 반사되어 내 가슴을 터치하면 마음속에 일렁이는 기분 좋은 간지러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저 우아함도 내게로 반사되었으면 싶고. 이런 게 바로 살아있는 '디테일'의 힘일까. 엘리베이터로만 오고 갔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비밀인 듯 비밀 아닌 이 공간과 장면을 놓치지 않았음에 뒤늦게 뿌듯함이 밀려오고. 계단과 마주한 새하얀 벽엔 풍경화, 초상화 그리고 추상화까지 형형색색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데, 이 모습은 또 알렉산드라의 손과 팔, 목과 귀에 감긴 루비나 사파이어 느낌이랄까.


오색 창연 한 보석이 빛나던 비밀스러운 공간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건 흑과 백의 아름다운 대립이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들어선 복도의 바닥은 흑의 카펫이 둔중하게 깔려 있고 백색의 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몽상에 잠겨있던 내 정신을 선명하게 깨워낸다. 알렉산드라는 왜 모든 게 이토록 이리도 차분하고 고요할까. 이 복도를 거닐었을 때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차분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을만치 슬로모션으로 기억에 새겨져 있다. 삶의 여백을 걸어볼 기회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늘 여백이란 건 하얗디 하얀 순백색의 빈 공간이리라 생각해왔었는데, 그래서 내 삶에 저토록 깨끗한 여백을 만드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활활 치며 바쁜 척을 하며 살아왔었는데, 흑과 백 사이에 가만히 서서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지금이 내 삶의 '여백'이구나 싶더라. 모르고 지나갔으면 먼 훗날 참으로 슬퍼지겠지. 어둠을 지르밟고 서서 저 멀리 하얀빛이 내게로 반사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나직이 말하는 따스한 목소리. 여백이란 곧 느림이겠지. 나는 본질적으로 느린 사람인 데다가 느림을 지향하곤 했지, 라는 새삼스러운 발견. 빠른 속도에 미쳐있는 세상이 무조건 옳은 줄로만 알며 살았던 아둔한 나에게 알렉산드라가 일깨워준 여백의 경각심. 흑과 백의 충돌과 갈등으로부터 조개 속 진주알처럼 건져낸 마음 한편 찾아드는 자유함이여! 복도 끝 무심히도 홀로 자리한 나무의자에 괜히 눈길 한 번 건네고 그제야 뱉어내는 민망함의 미소 한 자락, 방으로 들여놓는 가벼워진 발걸음.



머리가 띵 잠시간 어리둥절 거렸던 알렉산드라 대탐험의 서문을 열고난 후 찾아든 강렬한 허기야 말로 여행자의 담담한 현실이로다. 여섯 시간 스톡홀름-코펜하겐 기차행은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엽서에 사랑 편지도 끄적이면서, 낯선 이들과 스톡홀름 펠란스 캐러멜도 나눠먹은 데다가, 식당칸에 마실 나가 빈티지 조명 아래에서 커피도 홀짝였기에 그저 즐겁기만 하였건만 노곤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으니. 코펜하겐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은 밤 산책으로 미루기로 하고 컨시어지에 저녁 식사를 문의해본다. 역시 내 상상과 예측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인가. 이 기분 좋은 반전을 어쩐담? 호텔 알렉산드라 1층에 있는 레스토랑은 바로 베트남 퀴진 레레(lêlê)였던 것이다. 부티크 호텔이니 가능했던 조합 아닐까. 갑자기 기분과 컨디션에도 대반전이 펼쳐지면서 마치 오랜 시간 접하지 못한 소울 푸드 대하듯 신중함을 기해 매콤한 맛이 난다는 쌀국수와 에그롤을 주문했다.


저녁 어스름의 청량감이 감돌고 맑은 향기가 피어나는 정원석을 독점할 수 있는 행운까지 누렸다. 당연히 로컬에도 활짝 열려있기에 식사를 마칠 때 즈음 한 테이블씩 채워졌지만 그 사이 제대로 된 쉼을 제법 느리게 갖는 호사를 누렸다. 독점이란 정말 인간의 고유하고도 내밀한 욕망인 듯. 이 잠깐의 독차지가 여행이 서프라이즈로 안겨준 선물이자 사랑 같아서 말이지. 로비에 비치된 호텔 알렉산드라 신문을 하나 집어 들고 와 식사에 벗 삼고, 뜨끈하고도 이국적인 맛과 향이 짙은 국물을 들이 삼킨다. 이상한데 맛있네, 낯선데 매력적이고 말야. 아...탄성 없이 먹을 순 없지. 하늘 한 번 바라보고 국물 한 모금 쭉 들이켠 다음 바삭하고 기름진 에그롤 크게 한 입 베어 무니 희미하게 기억나는 삶의 모든 고난과 불행이 다 용서되는 듯한 여유가 찾아온다. 갈등과 방황, 외로움 모두 국수 한 그릇 싹 비워내듯 다 마셔버리자 싶고. 인생은 뒤죽박죽 복잡한 게 분명한데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나니 이리도 단순해지는가? 암 그렇고 말고. 여행을 향한 기대와 의지가 새로고침 되는 기분이다. 거듭 여행할수록 더 단순해지거라 내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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