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20
호텔 알렉산드라가 음악이라면 재즈일 것만 같아. 클래식한 전형과 완전한 자유로움 사이를 오가는 느낌이랄까. 음, 술이라면 단연 위스키가 어울려. 단숨에 싱글몰트 스카치 보모어(Bowmore)가 떠오른다. 스모키한 피트향에서 최고의 세련미가 느껴지는데 한 모금 두 모금 음미할수록 과일의 달콤함과 부드러운 향긋함을 만나게 되면서 마음 한구석이 사르르르 녹아내리는, 기분 좋은 균형감을 모든 감각으로 만끽하는 만족감과 닮았단 말이지. 그리고 도시라면 코펜하겐. 코펜하겐에 있지만 다른 어떤 도시에도 어울릴 수 없을 코펜하겐 그 자체인 것만 같고. 혹여 다른 도시에 옮겨 놓는다 해도 코펜하겐을 상징하는 모습일 것만 같다. 이 작은 공간이 100년의 역사와 위엄을 지켜오면서 이 도시에 완벽히 물들어 모든 것을 빨아들여 만들어낸 궁극의 컬러가 곧 호텔 알렉산드라의 화이트 아닐까. 모로코 마라케시에 마조렐 블루가 있다면 덴마크 코펜하겐에는 알렉산드라 화이트가 있다, 고 외치고 싶다.
서걱 거리는 화이트 침구가 마치 흰 캔버스 같더라니. 그 위에 눕고 기대고 오르락내리락거린 나는 순백의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이었다. 어떤 색이었을까, 파란색이었으면. 순백의 벽과 창과 침대 사이 그리고 그 여백에 드리워진 보이지 않는 화려한 정신의 축제가 일어났던 현장. 흰 벽을 바라보며, 창밖을 내다보며, 또는 어여쁜 조명을 어루만지며 수많은 생각을 끄집어내고 펼쳐 보았었지. 알렉산드라가 만들어준 차분한 몸과 마음 안에서 피어오르던 조용한 열망. 그 열망의 내용인즉슨 다름 아닌 여행과 모험이었지. 언제든 어디로든 유유히 떠나자고, 모험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말자며 나를 부단히도 설득하던 그때의 그 생동한 활력이 새삼 그립다.
정착이란 건 나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오랜 세월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때가 되면 방랑자처럼 훌쩍 떠나는 것이 진짜 내 모습이리라 확신했었다. 그때가 어느 때일지 미리 예측하는 건 늘 어려웠지만, '그때가 지금'이라는 느낌이 임박해올 때면 주저하지 않았다. 한 때는 '정착을 원하지 않음과 방랑만을 공상하는 이 증상과도 같은 성향'의 온갖 이유나 근원을 찾아내겠다며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틀에 가두려 한 적도 많았다. 내 또래 남들과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서, 부모님의 염려 섞인 잔소리에, 인생 선배들의 (애정은 없고 오지랖만 가득한) 충고에 못 이기는 척 흔들리는 연기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음을 금세 깨달았다.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면 사는 모습이 다른 건 정말 다행 아닌가 생각한다는 것. 제각각의 인생이 어찌 같을 수가 있나, 차라리 다름이 뉴 노멀(new normal) 아닌가 싶더라. 부모님의 잔소리는 어쩌다 한 번 연중 이벤트 정도였지 엄밀히 내 방랑을 막으셨던 적도 없었다. 팩트 체크! 여기저기 충고를 건네는 이들의 말을 애당초 귀담아 들었던 적 없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여전히 떠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갖은 궁리를 하며 유목민의 삶을 상상하는 이런 내가 실은 늘 좋았다. 아슬아슬한 맛도 있고, 스토리도 쌓여가고, 뜻밖의 일들이 종종 펼쳐지니까. 나이 들고 힘 없어지면 후회할까? 어느덧 마흔을 목전에 둔 나는 이제 나를 잘 안다. 후회보다는 추억을 하겠지. 그리고 여전한 방식으로 또 다른 여행과 방랑을 계획하겠지. 그래서 오늘도 얼굴 잔뜩 찌푸리고 근력 운동, 빠샤. 방랑은 체력과 함께, 오예.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아한 도시의 한 조각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지더라. 완벽한 하늘 덕분에 영화 도입부 장면으로 쓰면 어울리겠다 싶고. 그저 모든 풍경이 선물 같아 달뜬 기분에 한참을 바라보는데 정말이지 귓가에 재즈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지. 전날 밤 다녀온 더 스탠더드 재즈 클럽에서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오마주한 연주의 여운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재즈스러운 창가에서의 순간이 과연 내 삶에 있었는가 말이다. 이것은 과거를 향한 한탄이 아닌 '지금 여기'의 기쁨에 대한 감사와 희열이었으리라.
어느 오후 홍차를 우리고 티푸드 하나 꺼내 둔 다음 북유럽의 상징과도 같은 고상하고 기품 있는 조명 갓 아래 마음의 자리를 잡고 멋진 의자에 몸도 자리를 잡아본다. 스웨덴에서 귀하게 구해온 예술이 가득 담긴 아크네 매거진을 보며 '내가 만일 예술가라면' 따위의 상상에 빠져본다. 너무 제격인 공간에 있잖아, 란 만족의 외침 한 마디. 밤 산책에서 사들고 온 청포도의 향긋함을 벗 삼아 지출 내역을 정리하던 어떤 밤에도, 보랏빛 배쓰밤을 욕조에 휘리릭 던져 넣고 나릿한 목욕을 즐길 때에도 찾아든 생각 한 토막, '여행이 혹 여기까지 만 이더라도 괜찮다' 싶더라. 여기 이 도시, 이 공간에서 유독 고요함과 편안함에 둘러싸여 공간과 정신의 여백을 오롯이 즐기는 나 자신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이 마냥 좋아서. 기억해야겠지, 나는 분명 한 때 머나먼 곳에서 이토록 고요했고, 기뻤고, 그윽했음을. 그리고 그때의 나는 언제 곤 꺼내쓸 수 있는 나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