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놀이터, 그곳은 호텔

호텔심리학 22

by Wendy An

호텔은 놀이터다. (우리)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 타이베이에서 돌아와 한동안 S호텔을 그리워하며 줄곧 떠올랐던 한마디는, '놀이터'. 노는 게 제일 좋지, 아무렴. 그런데 이 놀이터는 연중행사 격으로 제법 비싼 비용을 들여야 입장(?) 할 수 있다는 게 애로사항이지만 단 며칠일지언정 그 머무름이 워낙 즐겁고 달콤하니까 결국엔 탁월한 선택이지. 놀이터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때야 하는가 생각해본다. 여행만 떠나면 여행자가 되고, 놀이터에 발만 붙이면 제대로 노는 사람일까, 아닐 것이다. 즐거움이야말로 노력 아닐까? 물음이기도 하지만 작은 외침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마음의 태도 말이다. 신나게 즐기는 것도 적극적으로 쉬는 것도 모든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도 말 그대로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나를 신나게 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 마음을 준비하면 된다. 놀이터에서 놀기로 한 거니까, 딱 그에 걸맞게. 느슨하고 편안하게, 신나게.


필립 스탁은 어쩌면 이곳 S호텔과 연이 닿은 이들에게 이 느낌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지. 놀이터에 놀러 온 기분 만끽하고 거닐며 마음껏 즐거워하라는 사인을 여기저기에서 보내주는 것 같더라. 거장일수록 그의 철학과 스토리 또는 의도를 쉽고 간단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만들고 빚어 우리네에게 선보이는 게 아니던가. 그야말로 거의 모든 공간 곳곳에 정말이지 편안히 앉아 가만히 게으르게 쉴 공간이, 더 정확히는 '의자와 소파'가 많다는 게 세심한 배려로 느껴졌다. 푸근하다랄까. 겉으로는 모던한 디자인과 인테리어가 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심한 디테일과 오브제에서는 그윽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데 그걸 그니까 누구도 모를 수가 없게끔 섬세히 이끌어준단 말이지.


하나씩 구경, 아니 '관찰하고 감상'하라며 시선과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절묘하게 놓은 듯 펼쳐지는 다채로운 오브제의 향연. 로비 라운지에서, 레스토랑 & 바에서, 또 방에서 각기 다른 분위기와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과 조명과 이름 모를 예술작품들의 조화를 보노라면 마치 새로운 버전의 현대미술관에서 테마별로 공간을 옮겨 다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바라보고 만져보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오감을 사용한 교감으로 나도 공간과 오브제도 다 함께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역동적인 전시 같더라. 그속에서 나조차도 오브제의 하나가 된 것만 같아 더 특별했다랄까. 맞아, 호텔이라는 공간과의 진정한 관계 맺기는 숨바꼭질하듯 구석구석을 드나들며 디테일에 눈길과 손길을 건넬 때 시작되는 거야. 촉감이야말로 폭발적 교감 아닌가 말이다. 그러곤 나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설레게 하는 것을 (그게 무엇이든) 발견한다면 결코 허투루 넘기지 않겠단 다짐을 해보는 거지. 어쩌면 나를 향한 진실된 관심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관심을 감각에 심고, 기억에 넣고, 마음에 아로새겨보는 거다.


쉴 새 없이 '앉는 공간'에 매료되었던 여정이었다. 방에선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창가에 기대어 반나절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뜬히 누워있겠다 싶은 하얗고 긴 가죽 소파와 통나무 조각을 있는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묵직한 금빛 스툴에 틈만 나면 앉아 쉬었고, 틈을 만들어도 앉았다. 아늑함과 새로움 사이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 이런 게 궁극의 적당함이지 싶고. 사람도 일도 딱 이 정도의 적당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다. 지하 바(bar)에는 보일 듯 말 듯 숨겨진 공간이 몇 있었는데 기어이 모든 곳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펼쳐지던 멋진 오브제 파티. 상판에 멋진 금발의 여성 사진이 프린팅 되어 있는 조그마한 원형 테이블이 한눈에 훅 들어왔다. 어찌나 탐나던지. 그 옆엔 오랜 세월을 머금어 빛이 바랜 가죽 의자가 있길래 살며시 앉아 보았다. 무언가를 간직한 듯 새겨진 구김살과 중후한 갈색의 색감이 오히려 더 모던하게 보이더라. 그렇지, 새로움이란 건 본디 오래된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까. 내 삶에도 얼굴에도 서서히 나타날 주름이 이처럼 매력적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란 생각도 해보면서. 그럼 나이는 들지만 더 모던해지는 거니까, 훗.


지루할 틈을 허용하지 않는 놀이동산과도 같은 이곳에서도 웬걸 애정이 더 가는 스폿이 생기더라. 방이 있는 층에 다다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펼쳐지던 장관이 하나 있었는데, 가히 압도적인 아름다운 의자의 항연! 화려함과 우아한 자태로만 보면 단연 여왕의 의자다. 블랙과 골드가 만들어낸 오라(aura)는 조화로움이라기보단 위엄이랄까. 넓고도 높은 그 의자에 앉으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감도 금세 솟아나겠더라. 더욱 이 의자를 여왕스럽게 만들어 준 또 하나의 오브제가 바로 곁에 있었는데 온통 금빛인 얼굴 모양을 한 스툴이다. 크기는 고작 여왕 의자의 오분의 일 정도이나 조명이 반사되어 한없이 빛나는 금색의 얼굴과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듯한 눈코 입의 근엄한 표정이 언제까지나 여왕 곁을 지켜온 호위군 같더라. 이상하지, 의자와 스툴은 그저 이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을 뿐인데 마치 무언의 열연을 펼치는 한 편의 극을 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게 바로 예술의 끌림인 것인가. 그 끌림에 매번 굴복했다, 기꺼이 즐거이.


빠르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세상. 속도와 성과를 어서 보여달라며 재촉하는 사회와 삶. 세상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 삶도, 한쪽 귀를 살짝 닫고 내 속도를 정해 그대로 가는 삶도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와 옳음을 가졌으리라. 내 삶은 어느 쪽인지 살펴보면 때론 어느 쪽에도 들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하고 때론 과연 내속도라는 게 뭔지 혼란스럽고 또 어느 때엔 그래도 맞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마음속 발을 동동 구르며 온갖 상념에 빠져든다. 그래서인지 여행만큼은 효율을 내려놓는다, 아니 버린다는 게 더 정확할 듯. 가성비, 가심비도 잠시 잊는다. 그저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곳, 오감으로 충만히 느끼고 싶은 것에만 오롯이 마음을 쏟는다. 그 쏟아부은 마음이 쌓여 여러 도시로 나라로 공간으로 흐르고 흘러왔는데 거기에 '호텔'이 있더라. 나를 잘 들여다보고 나와 잘 맞을 것만 같은 호텔을 찾고 고르고 그저 나를 거기에다 데려다 놓으면 자연스레 여행의 8할이 채워지더란 것. 효율의 반대말을 찾아보았더니 비효율이란다. 흠, 비효율이라기보단 왠지 '사랑'일 것만 같은데. 효율을 잠시 잊으면 생각과 마음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사랑이 샘솟아나요. 내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보면 좋고 그래서 또 보고 싶은 것, 기대어 좀 쉬었더니 새삼 느껴지는 행복감, 자세히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더니 발견되는 내 취향, 앉아만 있었는데, 바라만 보았는데 느닷없이 많은 아이디어가 샘솟아 나는 흥분 같은 것. 무언가를 흠모하는 나를 관심과 애정으로 관찰해보는 것도 나를 향한 사랑이고, 내가 어떻게 쉬어야 충전이 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열심히 관찰하고 찾는 것도 사랑이니까. 한마디로 훌쩍 여행을 떠나 호텔에서 마음껏 놀고 쉬는 건 사랑이다 이 말이지. 사랑합시다, 우리.


마지막 만찬(?)이 떠오른다, 진한 블랙커피와 트러플 향이 일품이던 두툼한 프렌치프라이. 커피에 대체 안 어울리는 게 뭐람. 느릿느릿 타이베이 거리를 거닐다 다시금 S호텔에 돌아와 햇살 좋은 라운지 창가에 자리 잡고 미처 다 채우지 못한 허기를 달랬던 그 순간. 공항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차량을 기다리며 한동안 멍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커피는 진한 그리움을 마시는 것 같고, 감자는 아쉬움을 씹어 삼키는 것 같더라. 너무 맛있는데 슬퍼본 적 있나요? 시야에 들어온 호텔 공간의 모든 것을 찬찬히 하나씩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마음에 담았지. 이 놀이터에서의 추억 잊지 않겠노라고. 잊지 않는 게 아마도 사랑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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