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난 유럽, 라이즈(RYSE)호텔

호텔심리학 23

by Wendy An

그런 날이 있다.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기 싫은데 집에도 있기 싫은 날. 이 웬 모순인가. 집이어서도 안되고 회사여서는 더더욱 안될 것만 같은 그 어떤 날. 극약처방을 쓰는 수밖에! 성급히 휴가를 내고 신속히 핸드폰을 열어 검색 신공을 펼친다. 결코 어렵지 않은 일, 가고 싶은 곳은 언제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법. 얼마 전 여행 잡지 에이비로드 독자기고 글이 채택되어 받은 상품권을 활용, 여분을 보태어 스테이케이션 1박을 예약한다. 이로써 모순도 갈등도 한 방에 해결한 셈이지. 불현듯 찾아온 줄 알았던 마음속 소용돌이의 실체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차곡차곡 준비해 온 내밀한 욕망의 발현이랄까. 호텔에 너무 놀러 가고 싶어서,라고 하면 사실 한마디로 간단한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주저리주저리 중언부언. 일곱 살 다섯 살 조카들이 놀이터에 가고 싶다며 부리나케 버선발로 뛰쳐나가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데(심지어 예뻐) 우리 어른들이 놀이터 가고 싶다며 설레발칠라 하면 은근히 뭔가 눈치 한 번 보게 되고(누구 눈치를?) 변명이 나온다니까, 흥.


띄엄띄엄 찾아오는 방랑벽에 저항이란 불가능하다. 아니, 저항하고 싶지 않아요. 강렬하게 찾아오는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다 보니 어느새 발길 닿은 홍대.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유럽 어딘가의 느낌, 라이즈(RYSE) 호텔. 겨울의 끝자락, 스테이케이션(staycation) 메이트로 엄마를 초대했다. 오감을 자극하는 건축과 공간 그리고 예술의 모든 형태를 흠모하고 즐기는 엄마에게 활력과 기분전환을 선물하는 기회였지, 실은 나에게도. 이 구역의 테마는 역시 '젊음'인가! 라이즈는 젊다. 한두 걸음 들어선 순간 생기발랄하고 스타일리시한 멋이 구석구석 배어있어 정신의 화학작용이 바쁘게 일어나 기분이 금세 고양된다. 감각적인 디자인과 다채로운 컬러, 키치 한 아트워크(art work)에 둘러싸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심심할 틈이 없다. 이런 게 바로 놀이터가 아니고 뭐람. 체크인을 앞두고 1층에 있는 타르틴 베이커리에서 한낮의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기며 설렘이 몽실몽실 피어날 때부터 내 알아봤지. 찾았다, 신나는 어른이들의 놀이터!



여행이자 놀이의 개념으로 스테이케이션을 즐기는 주요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의 욕구와 기대는 갈수록 높아지면서도 복잡해지는 듯하다. 그들의 심리와 욕망을 비스듬히 나마 엿볼 수 있다면 호텔은 더욱 재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저도 그니까 그 밀레니얼... 헛). 공간에 들어섰을 때 스멀스멀 피어나는 위화감(이라 쓰고 우월감이라 읽는다)이나 무턱대고 화려하기만 한 휘황찬란함은 더 이상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이유와 맥락이 있는 공간 구성과 보일 듯 말 듯 은은하면서도 놓치지 않을 만큼 드러나는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은 콘셉트의 테마가 필요하다랄까. 여행이 그리운 이들에게 어딘가 다른 나라 다른 도시를 연상시켜주는 것도 적잖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내가 만난 라이즈 호텔 첫인상은 암스테르담이었다. 암스테르담을 거닐며 거리에서든 건축물 안팎으로든 자연에서든 정말 어디에서든 디자인과 감각적 요소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그 기분 좋은 현기증의 추억을 불러일으켜준 만남이랄까. 누군가에겐 베를린이, 또 다른 이에겐 어쩌면 스톡홀름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각 도시의 매력이 공간으로 옮겨졌을 때의 이 강렬함이란.



콤비네이션의 대잔치가 되어가는 듯한 이 시대의 호텔이여, 사랑합니다. 라이즈 호텔에 머물며 문득 우리나라의 옛 정자가 생각났다. 휴식과 관망의 장소이자 풍류 가득한 신선놀음의 현장이었던 그곳. 누구나 드나들며 눈인사 말 인사 주고받고, 풍경과 바람 벗 삼아 술잔도 부딪히며 한 가락 시와 노래도 읊는 그림이 그려지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 오늘날 호텔로 옮겨온 것 같단 말이지. 숙박을 하지 않아도 호텔의 이런저런 열린 공간에 드나들며 호텔의 공기와 온도도 느끼면서 볼 것 즐길 것 먹을 것 등을 신나게 누리는 21세기 신선 밀레니얼들의 니즈와 흐름이 배어든 것이겠지.


라이즈 호텔엔 정자가 여럿 있다. 그 누가 예술을 마다하리, 삼청동의 명물 아라리오 갤러리가 있고, 온갖 포토북과 아트 매거진을 실컷 탐닉할 수 있는 라운지 라이브러리와 흡사 박물관이 아닌가 싶어 흠짓 놀라며 들어섰다가 나오기까지 한참을 머물게 되는 진기한 아트웍으로 가득 찬 편집샵 웍스아웃(Worksout), 태국 맥주로 목을 축이며 그윽한 조명과 화려한 공간미 사이에서 온갖 종류의 향신료 파티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롱침(Longchim), 그리고 피날레 루프탑 바(bar) 사이드 노트 클럽까지. 혼자여도 함께여도 따로 또 같이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찬찬히 거닐고 노닐다 보면 하루의 끝에서 즐거움과 충만함으로 채워진 나를 그리고 우리를 만나게 된다.



호텔과 정자란 콘셉트에 빠져들다 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호텔이 품은 서점, 도서관, 코워킹 스페이스, 로컬 카페와 꽃집, 캐주얼한 이색 레스토랑, 키친 스튜디오, 차(茶)와 명상 공간, 갤러리까지. 나에게 묻는다. 호텔의 흥미진진한 컬래버레이션, 어디까지 가봤니? 라이즈 호텔, 자꾸만 내게 말을 걸어오는 가보다. 이런 자극 저런 자극이 살랑이는 저녁 어스름 바람처럼 이리저리 나를 훑고 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일렁이는 생각 속 스파크! '어른이 놀이 문화 연구소(?)' 같은 게 있다면 참말 좋겠다. 정성껏 여행하고 놀았던 이야기로 일필휘지 하여 이력서를 써내 두 손 공손히 모아 지원할 텐데 말이다. 지금껏 해온 어떤 일보다 왠지 더 잘할 것만 같은 이 느낌적 느낌. 혹시 거기 누구 없나요...? 듣고 있나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라고 누군가 그랬지. 때가 된 것인가.



시원한 라거 드래프트 한 잔 들이키며 생각해본다. 고요하고 차분했던 하루 같았지만 생각과 마음속에서 벌어진 흥분과 희열은 가히 파티 수준이었단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진정한 어른의 놀이란 건 과연 이런 것인가.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하는 호텔과 나 사이의 폭발적 케미여!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넌지시 건네 온 엄마의 대답은 잠시 일상과 떨어져 보내니 기분전환도 되고 기대 이상의 멋진 디자인을 실컷 보고 있노라니 잠들어 있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노라고. 소녀처럼 새침하게 웃는 엄마가 새삼 너무 예쁘다. 여행이란 게 그런 거지. 혼자일 때는 나 하나만 만족시키면 그만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있어도 그조차도 즐겁고 괜찮은 것. 그런데 함께인 여행이라면 생각도 그림도 다르다. 내가 반응하고 감동하고 애정 하는 것에 함께하는 이가 더 즐거워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한 바람을 갖게 되니까. 갤러리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것 같던 엄마의 모습, 멋진 조형물을 바라보며 우아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다가 급 돌아서서 사진 한컷 찍어달라며 카톡 프로필에 쓰겠노라고 깔깔거리던 모습 그리고 편집샵에 들어가서는 하염없이 앤틱 가구를 바라보며 그 멋에 흠뻑 빠져있던 모습을 다 카메라에 담아두길 잘했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자니 엄마에게도 충분히 놀이터가 되어준 호텔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더라. 물론 우리 함께여서겠지. 그래서 더 소망하게 되는 엄마와 오래오래 함께할 호텔 놀이, 그리고 여행. 그래서 오늘도 찾아 나선다. 전 세계 곳곳에서 나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서로 결이 맞고 전기가 찌릿 통할 우리들만의 놀이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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