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에필로그
여행을 취소했다. 슬픔이나 절망 따위와는 자못 결이 다른 감정이 솟구친다. 자세히 살펴보려니 먹구름 다가오듯 마음이 새카매진다. 마지막으로 작게 한 번 더 읊조려봅니다, 코로나 나빠요. 어느덧 팬데믹 시대에 적응한 듯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떠날 수 없다는 건 중벌과 다름없다. 이 기회에 삶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하나. 이토록 무거운 형벌이라뇨. 그저 지난 여행의 흔적들을 만지작 거리며 마음 한구석을 달래볼뿐. 나는 어른이니까 성숙하고 차분해야 해, 라는 선의의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건네 보지만 소용없다. 한낱 인간일 뿐인 나의 나약함이여. 하지만 생각을 달리 해봄 직도 하다. 지난 몇 달 동안 예약해두었던 호텔 세 곳의 담당자들과 연애편지보다도 더 자주 더 많은 이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서로의 안전과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며 그새 정이 들어버린 것. 이것이야말로 팬데믹 시대의 새로운 네트워킹 아닌가 말이다. 모두 안녕하소서. 그리고 꼭 만나요.
지난 2월 프롤로그를 둥둥 띄워 연재를 예고했던 그날로부터 어느덧 5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의 여정도 분명 여행이었으리라. 더 사무치게, 더 그립게, 더 애절하게 추억과 상상 사이를 바삐 오갔던 날들. 돌이켜 보면 이 끄적임의 나날이 없었더라면, 이 추억의 놀이가 없었더라면 하루하루 원망과 불평 사이에서 허우적대지 않았을까 싶어 안도의 한숨이 푸우 내뱉어진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라며 의심과 회의를 품었던 내 편협함을 불식시켜준 것이 글로 채워온 여정 아니었던가. 먼 곳으로의 여행은 아직 요원하지만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랄까. 몸도 마음도 가볍게, 지갑은 더 가볍게 말이지. 호텔과 여행 이야기는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봄날의 벚꽃잎처럼 그 수가 한없이 많겠지만 분명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리라.
호텔과 나 사이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보낸 시간 동안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내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이 어디인고 하니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던 나만의 세상, 내 취향과 욕망 그리고 꿈으로 채워진 곳. 더 잘 살아내야 할 것만 같은 현실의 삶보다 실은 더 애지중지 하는 내 삶의 작은 정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면의 세상. 공상과 상상에서 출발해 책이라는 정류장들을 거쳐 여행이라는 종착점에 다다른 게 내 삶의 행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웠던지. 삶의 행로에서 이렇다 할 만한 이룬 것도, 된 것도 없고 대신 지극히 내밀하고도 사사로운 이야기들로만 채워온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부끄러웠음을 부끄러워한다. 그 이야기들을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꾸고 나누지 않았음을 깊이 반성한다. 먼저로는 나를 향한 반성이요, 다음으로는 언젠가 만날 소중한 독자를 향함이다.
오래전 어느 날 여행으로, 호텔로 나를 초대했다. 그렇게 시작된 호텔을 향한 탐닉과 애정은 곧 나 자신을 향한 탐색 및 발견과 다름없었다. 어떤 도시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어느 특별한 호텔과 맺은 관계 그리고 추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보석이 되어 내 안의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 반짝임을 드디어 나누게 된 이 자체만으로도 어딘가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을 그 누군가 한 명에게 가닿은 것만 같다. 호텔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 세밀히 음미하며 감동할수록 발견되는 것은 결국 '나'였다. 이런저런 모습이었으면 하며 내일의, 미래의 나만 바라보며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진짜 나, 무엇보다 오늘의 나.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변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해본 시간이었다랄까.
낯설고 멋진 도시의 어느 공간에 나를 툭 떨어뜨려 놓으니 공간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그에 화답하다 보니 이야기가 쌓였다. 닮고 싶은 매력으로 가득했던 공간도 만났고, 나를 따스히 안아주는 공간도 만났지. 자연을 닮은 곳에선 자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아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던 생각의 타래가 스르륵 풀리는 것도 같았고. 통제와 강박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느슨히 풀어놓으며 무념무상의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고. 오래된 것에 깃든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충만함이 가득해질 무렵엔 숨겨놓다 못해 방치할 뻔했던 상처와 두려움에도 직면할 수 있었다. 여러 상념을 내려놓고 매 해 초대에 기꺼이 응했던 나 자신을 기특히 여기려고 한다.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마다 지난날의 모든 여행을 끄집어내 그때 발견한 나를 그리고 모아 온 이야기를 꺼내어 보련다.
우리네 삶이란 게 잠시 이 땅에 다녀가는 여행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잖은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건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일 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을지는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보는 수밖에 없겠지. 먼 나라에서 건진, 호텔이란 특별한 공간에서의 탐닉과 경험 모두 다다를 끝이 있고 돌아올 제자리가 있어 한없이 빛날 수 있었으리라. 추억을 지닌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호텔이 부린 마법에 기꺼이 걸려 마음껏 누릴 준비가 언제나 돼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가지런히 쌓아온 감사와 추억 속에서 오늘도 꿈꿔보는 여행 그리고 새로운 호텔. 인생은 아름답고, 호텔은 찬란하다. 언젠가 다시 떠날 그날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