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해버린, 어느덧 애틋해진 S호텔

호텔심리학 21

by Wendy An

큰 계획 속의 무계획 여행은 짜릿하다. 여행 결정이 즉흥적이라면 더욱 그러하지. 3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성사된 타이베이 여행은 날마다 나를 잠식해버리던 시간의 질주 속에서 마주한 STOP(멈춤) 사인 같았다. 과연 언제쯤에야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원히 풀 수 없을 숙제 같다. 하지만 여행할 시간은 기어코 낸다는 것! 스스로를 기특히 여겨야 할지 모종의 경각심을 가져야 할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아무렴 어떠리,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하면 그만인 것을. 3일의 여정 동안 무엇을 할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에 머물고 쉴 것이며 무엇을 먹을지에만 온 생각을 집중했다. 단 며칠 만에 이 중요한 미션에 대해 긴요하고도 긴박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게 부담은커녕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때만큼 신나는 순간은 아마도 평생 없지 않을까. 여행을 앞두고 있는 그 두근거림 가득한 시간. 마음껏 들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위풍당당한 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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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에만 존재하는 호텔을 찾는 일은 늘 즐겁다. 그곳과 연이 닿아 머물게 된다면 그 즐거움은 한 차원 높아지고. 짧고 굵게 타이베이를 샅샅이 뒤졌다. 낯설고 특별한 흥분이 감돌더라. 단 한 번도 즉흥 여행을 떠나본 적 없는 자로서 이 다이내믹한 세상에 이토록 뒤늦게 들어섰음을 반성한다. 타이베이스러움을 아직 알지 못하기에 그저 마음이 끌리는 대로 어떤 특별함을 찾아 생각과 마음이 날아다니도록 했다. 그리하여 발견하고 만난 곳은 바로 S호텔. 정확한 이름이 무려 S호텔 디자인드 바이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이다. 20세기 전방위 세계 최고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란 이름만으로 이미 엄청난 호기심을 발동시키면서 과연 타이베이 호텔에 녹아든 필립 스탁의 디자인이란 무엇일지 어떠할지를 목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며칠 간의 머무름을 할애할 가치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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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호텔을 이리도 원하는 이유가 뭘까, 곰곰 생각해본 적 있다. 무엇에서든 남들과 다르고 싶은 욕망은 늘 들끓고 있지만, 단순히 그게 전부라 결론짓기엔 자못 복잡하다. 내 마음과 감각을 터치하는, 나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을 여행에서 특별히 '호텔'에서 발견하고 싶은 열망이 가장 크긴 하지만 나란 존재가 만난 어느 특별한 공간(호텔)과의 조화가 궁금하기도 하다랄까. 그 조화가 어울림이라면 그 가운데 내 역할은 무엇인지 따로 떼어 생각해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지. 정착보다는 정처없는 유랑이 편안함과 (신기하게도) 자신감을 가져다 주기에 낯선 공간에서의 나 자신이 웬만하면 맘에 든다. 누구와도 무엇과도 비교함 없이 그저 나를 오롯이 바라볼 수 있는 차분함과 고독 덕분이겠지. 때론 현실 도피이기도 하고 때론 적극적인 방황이기도 하고 때론 쉼이자 세상으로 뻗어 나가고픈 욕망의 실현이기도 한 여행.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으니 1년에 단 한 두 번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삶에서 반전을 꾀해보고픈 감춰둔 욕망도 한가득이다. 한 번쯤은 반전 있는 인생이 살고 싶다고 가끔(아니 자주) 생각했으니까. 그 가질 수 없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반전'과 가장 비스름한 모양새가 아무래도 여행이었지. 할수록 떠날수록 깊이 빠져드는, 아니 빠져나올 수 없을 블랙홀. 내 일상에서는 만들어 보기 어려운 반전을 여행과 호텔이 대리만족이란 형태로 또는 영감과 감동의 모습으로 안겨주는 것도 같더라.


왜 굳이 여행을 통해 나를 점검하고 반전을 상상하며 영감을 구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까. 생각해보면 당장의 현실에서 환경을 변화시키기란 불가능하고 결국 나를 변화시켜야만 갈등도 받아들임도 또는 도전도 실패도 한결 수월해지는 게 아닌가 싶더라는 것. 내 주변 환경을 내 힘으로 나 홀로 도저히 바꿔버릴 수 없으니 나를 낯선 환경(이왕이면 바라던 환경)으로 일단 데려다 놓는 것에서 시작해보는 거다. 일상이 지옥도 아니고 늘 괴로움으로 점철된 것도 아니지만 익숙한 일상의 루틴 속에선 익숙하고 뻔한 생각만 하게 되니까.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금씩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용기와 에너지를 꺼내기 위해서도 잠시간 나로서의 삶을 떠나보는 건 회피나 포기가 아닌 차라리 능동적인 직면이자 도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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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남짓 날아가 만나게 된 S호텔에 실은 첫눈에 반해버렸다(왜 매번 호텔에 반하냐 물으신다면 어쩔 수가 없어요... 훗). 안도감 가득한 부드러운 한숨이 나오더라. 분명 외관은 회색빛 으리으리한 빌딩인데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니 따스한 할머니 품에 포근히 안기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풍성한 백발의 긴 헤어스타일에 진주 목걸이를 겹으로 감싸 걸고 반짝이는 브로치와 반지 팔찌가 블링블링 빛나면서 화려한 패턴의 드레스를 우아하게 입고선 한 손으론 손키스를 건네주시고 한 손엔 샴페인 한 잔을 들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워너비 할머니. 아마도 짙은 원목의 인테리어와 붉기도 노랗기도 한 따스한 조명 빛 그리고 포근함이 금세 스며드는 카펫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이 이런 환상(?)을 불러일으켰으리라. 타이베이 거리가 아니라 S호텔 공간만 느릿느릿 걷고 싶더라. 이곳의 상징일까 싶은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오브제인 듯한 의자에 소파에 걸터앉든 기대어 앉든 책 한권만 있으면 음악 벗 삼아, 곳곳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그림 벗 삼아 쉬고 쉬고 또 쉬며 즐겁지 아니한가, 라며 콧노래 부르겠더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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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을 책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볼 수 없을 책이라 해도 책이 있는 공간은 무조건 좋다. 공간을 향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처음 만나는 내 마음을 일면 알아준 것만 같아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여기서 이 책 한 번 들춰보며 쉬라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아서. S호텔의 로비와 아래층을 이어 만든 한 벽면 가득 책이 채워져 있는 벽장은 정말 일품이다. 바라볼 때마다 어딘가 새롭고 아름답고 가슴이 충만히 채워지더라. 어떤 책들인지 흘끗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이 공간을 만든 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호기심 어린 상상도 해보면서. 며칠 머물며 가장 많이 거닐었던 곳은 크나큰 벽면의 책과 오브제를 하염없이 천천히 바라볼 수 있던 로비에서 아래층 레스토랑과 바(bar)를 잇는 계단이었다. 계단과 책이라... 조금도 저항할 수 없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정복하는 것들 아닌가. 끌림이란 게 이런 것인가 보다. 아니 운명인가? 만나고픈 공간을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고 바라며 상상할 때 결국 찾고 또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의 순간 필연으로 연결되는 공간과 나 사이의 그 폭발적 케미스트리 말이다. 파바박 터지는 불꽃같은 만남 속에 피어오르는 진심 어린 애틋함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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