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한 도시미란 바로 이런 것, 호텔 알렉산드라

호텔심리학 18

by Wendy An


북유럽 여행에서 기념품 삼아 가장 훔쳐오고 싶었던 건 바로 호텔 열쇠다. 스톡홀름 호텔 엣헴에서도, 코펜하겐 호텔 알렉산드라에서도. 너무 갖고 싶으니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마음으로만 훔쳐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혹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열쇠를 얻을 수는 없을지 한 번 쯤 묻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피어나는 걸. 시도해보지 않은 자에게 남는 건 후회뿐일세. 묵직한 무게감의 금속 덩이에 양각으로 새겨진 이름 'HOTEL ALEXANDRA(호텔 알렉산드라)' 그리고 부르기만 해도 시크한 도시미가 폭발하는 'COPENHAGEN(코펜하겐)'이란 글자가 여전히 마음에 울림을 준다. 호텔 알렉산드라도 100년의 세월을 머금은 곳이라고 하는데 마치 열쇠 하나에 그 모든 세월이 다 녹여져있을 것만 같다. 이 오브제 하나가 불러일으키는 생각과 감정이 머무는 내내 강렬하고도 특별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지.


6시간은 추억을 뒤로하고 설렘을 맞이하기엔 결코 넉넉하지 않았던 것일까, 스톡홀름을 떠난 기차는 일순간 코펜하겐 중앙역에 다다른다. 아직도 눈가에 스톡홀름이 아른거리는데 말이지. 하지만 얼마나 고대했던가 이 날을. 코펜하겐이란 도시를 향해 품어왔던 기대와 설렘이 고스란히 호텔 알렉산드라에도 향하더라. 내게는 도시로 더 깊이 들어가는 첫 관문이자 첫인상을 결정짓는 첫 만남이 다름 아닌 호텔이니까. 그 도시를 알고 싶은만치의 열망이 호텔로 전이될 때의 그 희열과 떨림을 기억한다. 기분 좋은 느슨한 떨림이지만 숨겨진 긴장감도 적잖은 다이내믹이랄까.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호텔 알렉산드라가 도보로 15분여 걸어 남짓 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게 뭐라고) 너무 행복했다. 그 15분 동안 느릿느릿 살포시 걸음을 옮기며 도시와 수줍은 첫인사를 나누듯 여기저기를 흘긋거리는 재미도 있을 테고, 호텔로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질 설렘의 기분에 한껏 취할 수도 있고 말이다. 삶에서 스스로에게 얼마나 ‘느림’을 선물해보았던가, 아니 허용해본 적은 있던가. 그래서인지 여행에서의 느림의 순간에 애착이 크다. 일상에서보다 시간이 더 아깝게 여겨질 것 같고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마음이 더 분주할 것 같았지만 여행하는 나는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나 자신에게 고맙던지. 갈수록 느릿해지는 생각과 마음 그리고 발걸음이 이제는 더 좋아진다. 이게 나이 듦이겠지. 자연스레 조금씩 생겨나는 여유겠지. 여행과 나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 너무 좋잖아.


만약 코펜하겐의 동의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도시’ 아닐까. 부를 때 차갑기도 하고 세련되기도 한 발음 나는 소리에서부터 ‘도시적’ 느낌이 잔뜩 묻어나는데, 잠시만 거닐어도 곳곳에서 시크함이 묻어나다 못해 뚝뚝 떨어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차에서 내린 직후까지 성가실 정도로 기승을 부리던 설렘과 즐거움이 잠시 꺾이더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말았다(왜?). 아닌데, 내가 준비해온 마음도 기분도 이게 아닌데, 이 장면은 뭔가 잘못됐어, 컷! 을 외치고 싶은 찰나의 순간이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싶다가도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도시에 괜시리 서운해져서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몸과 마음에 찾아드는 혼란을 잠시간 마주했다.


그런데 지금 기꺼이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적당히 시원하고 건조한 공기,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게 맑은 하늘, 고풍스럽고 우아한 키 작은 건축물, 훤칠한 키로 무채색의 패션을 휘감은 채 거리를 빠르게 활보하는 코펜하게너들, 따스한 미소는 뒤로 감춘 채 무표정의 위엄을 먼저 내보이는 듯한 분위기로 인한 것은 아니었나 싶더라. 아직 그 도시는 나를 찬찬히 살피고 있던 건 아닐는지, 맛있는 빵을 만들려면 예열된 오븐에 숙성된 반죽을 넣어야 하듯 우리 사이도 예열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는지. 비단 도시 때문이기만 할까. 아니올시다, 내가 무어라고 내가 세운 계획은 늘 완벽해야 하고, 어디를 가든 나는 환영받는 느낌을 받아야 하며, 유럽의 어느 도시든 나와는 찰떡 케미를 보여야 한단 말인가. 내가 세운 편견의 덫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것일는지도 모른다. 제 버릇 못 고친다고 한 때 내 여행은 늘 충만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있었는데 그 귀여운(?) 병이 다시 도진 것이라 해두자. 그래도 여행은 여행인 게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잠시 멈춤의 생각을 좀 하고나니 순간 못생긴 소리를 동반한 웃음이 터져 나와버렸다. 그 순간 도시와 나 사이에 문이 빼꼼히 열린 것만 같았다란 것.


코펜하겐의 도시적이라 함은 과연 무언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면 결국 기억 속에서도 휘발돼버릴 텐데... 조급 해지는 이 내 마음. 망울망울 피어나려는 생각에 잠기다가, 코펜하겐의 시크한 공기 한 모금 마시다가 어느덧, 드디어 도착. 어쩌면 이곳 호텔 알렉산드라에서 코펜하겐을 향해 생겨난 여러 물음에 답해볼 수도 있겠다. 빈티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자전거 여럿이 호텔 입구 곁 나란히 세워져 있다. 내 키만 한 높이의 자전거에 놀란 가슴 재빠르게 숨기느라 자존심이 슬쩍 상했지만 어여쁘게 달려있는 검정 바구니를 보니 오히려 그 속에 쏙 들어가 달리고 싶더라, 훗. 호텔에 들어서려니 다시금 설렘이 쓰윽 고개 내밀듯 찾아든다. 그럼 그렇지, 이게 나지,라고 나직이 내뱉고선 크게 한 걸음 떼어 들어선다, 짜잔!


첫인상은 딱 한마디로 ‘완벽한 적당함’. 덜어냄의 미학을 공간으로 선보이라면 호텔 알렉산드라를 보이면 될 것이다. 공간에 무엇을 더했을지 또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덜어냈을지 그 역사도 과정도 알 수는 없었지만 첫 느낌은 덜어냄으로 이루어낸 궁극의 적당함 속에 발 들인 것 같더라. 마음도 따라서 들여 놓는다.


고요함과 차분함이 바닥 공기를 채우고 있고, ‘내가 북유럽이다’라는 외침을 시크하게 쏟아내는 듯한 테이블과 의자의 디자인과 분위기가 중간 즈음을 책임지고 있다면, 하얀 벽과 천장과 단아한 조명이 멀끔히 떨어지는 슈트를 차려입은 호텔리어와 멋진 앙상블을 이루더니 우아한 윗 공기를 채우고 있다. 이토록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것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일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참으로 오묘한 기운을 뿜어낸다. 만약 사람이라면 무표정한 표정으로 채워진 얼굴이지만 그윽하고 강렬한 눈빛 한 번 반짝이더니 말 한마디 없이 모든 걸 말하고 있는 것처럼. 며칠 머무르며 이 비밀을 파헤쳐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싶었지. 열쇠를 건네받고도 바로 룸으로 향하지 않았다. 응접실 한편에 가만히 자리 잡고 앉아 한참을 멍하니 공간의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던 것도 같고. 잠시라도 차분히 공간에 집중하는 게 가장 멋진 인사이자 교감 아닐까 생각했지. 그러다 보니 아하! 모먼트가 찾아왔다. 호텔 알렉산드라에선 덜어냄과 비움을 배우자, 라는 생각으로. 내 삶도 나란 사람도 적당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소망으로. 그래, 나에게서 덜어낼 것은 무엇인가, 를 생각해보는 거다. 아무튼 반가워, 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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