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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May 02. 2024

여행 속에도 ‘휴가’가 있다

스톡홀름 '로젠달 가든'

왕의 정원을 바라보며 먹는 햄버거 맛이란. 연일 지속되는 햇살 가득 쾌청한 날씨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던 어느 날이었다. 스톡홀름 중심부에 위치한 쿵스트레드고르덴(Kungsträdgården) 건너편에 있는 버거집 창가에 앉아 큼지막한 버거 한 입, 사과주스 한 모금 하며 한가로운 기분에 유독 취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늦은 아침인 듯 이른 점심인 듯 식사를 한 후 향할 곳을 생각하니 설렜던 건지, 가슴이 간질 거리면서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새삼 의식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기억은 사실보다 정서에 기반한다는 말이 있잖은가. 어떤 사건이나 상황 속 사실에 대한 기억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지만 당시의 감정에 대한 기억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은 왜곡하고 꾸밀 수 있어도 느낌은 속일 수가 없다는 의미일 테지. 여행을 하는 동안 꽤 자주 상기하는 말이다. 제 아무리 완벽한 듯한 여행 계획을 세워도 늘 승리하는 건 기분이지 않은가. 게다가 ‘기분’을 우선순위로 두고 마음껏 즐기거나 제칠 수 있는 게 여행의 특권 아니겠나.


왕의 정원 정류장에서 7번 트램을 타고 가던 중 20분쯤 지났을까 싶은 때에 승객들이 모두 내렸다. 여기서부턴 걷는구나 싶어 신나게 따라 내렸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여쁜 포토샵 처리가 된 사진전 속 작품 같았다. 빛바랜 붉은 벽돌의 건축물이 크고 작게 늘어선 도심의 거리에서 여전히 여름의 색을 간직하고 있는 짙은 푸른색의 해협에 다다른 것이었다. 잠시 멈춰 풍경을 감상하노라니 마치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더라. ‘여기서부터 진짜 주인은 자연이니 트램은 돌아가시오, 인간은 사뿐히 걸어오시오’라고 말하는 목소리. 가지각색의 보트와 요트가 줄 지어 정박돼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차에 ‘아, 나는 지금 유르고르덴 섬에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삽시간에 자연의 마력에 사로잡혀 생각은 게을러지고 감각은 깨어나고 있었다.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요. 

수면에 비친 구름에 빼앗겼던 시선을 돌리고는 눈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고도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걷다 보니 불현듯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올랐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들어간 굴 속에서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어느 작은 문 밖의 정원’으로 향하고 있는 느낌이 들더란 것.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너무 알고 싶기에 일단 가보는 것, 호기심과 설렘을 동력 삼아 이왕이면 걸음걸음을 즐기는 것, 자연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에 더 세심하게 집중해 보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행지마다 다른 모습과 매력을 띠는 도심 속 자연은 늘 어딘가 비밀스럽고 때로는 환상적인 느낌을 건네주곤 한다. 내 몸과 영혼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힘과 기운으로 자꾸만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저항하고 싶지 않은 충동이자 굴복하고 싶은 유혹이다. 

풍성한 잔디로 뒤덮인 길과 작디작은 돌로 뒤덮인 길이 교차로 나타났다. 발바닥에 닿는 느낌과 발소리에만 집중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잡다한 생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즐거운 무념무상의 산책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무와 길과 나의 교감이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던 게 아니었을지. ‘서두를 거 뭐 있느냐고, 그냥 걸어보라고, ‘지금, 여기’를 충분히 만끽하라고’ 격려해 주고 토닥여주는 듯했다. 분명 자연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엉뚱한 상상에 빠지곤 한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언어의 수가 7,0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자연은 이 많고 많은 언어를 다 품고 있을까? 인간의 언어를 초월해 신과 교감하고 있을까? 과연, 자연이 구사하는 언어란 게 존재하는 걸까? 자연의 언어가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얼마큼이나 잘 이해하고 있고 해석하고 있는 걸까?


그저 걸었을 뿐인데 길 위의 철학자가 따로 없다.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걸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몇십 미터 너머 정면에 사랑스러운 살구 빛의 오랑주리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적지인 로젠달 가든(Rosendals Trädgård)에 드디어 가까워지고 있단 걸 느낀 찰나 마주친 풍경에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왔다. 조련사인 듯한 금발의 여성과 흑색의 풍성한 꼬리가 무척 우아한 말이 발을 맞추며 걷고 있는 거 아닌가. 한참을 달리고 난 후 갖는 휴식 시간인지 아니면 둘만의 비밀스러운 산책인지 궁금했다. 끝내 말의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스웨덴 여행을 하는 동안 마주한 여러 뒷모습 중 가장 아름답고도 기품 있는 뒷모습이었다. 인간과 동물의 친밀한 교감 혹은 우정을 목격할 때마다 마음에 찾아드는 행복감은 산책의 큰 묘미다. 때론 목적이기도 하고.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몇 군데 더 지나고 나니 로젠달 가든 입구 표지판이 나타났다. 촘촘하고 풍성한 데다가 푸르른 잔디밭을 거듭 만나고 나니 정말이지 한 번 그 위에서 굴러보고 싶더라. 부들부들한 잔디밭 위를 떼구루루 구르다가 사르르 낮잠에 빠져들고 싶었고 말이다. 수많은 유럽의 아름다운 정원의 역사는 늘 왕실과 연결되듯 로젠달 가든 또한 왕실의 정원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시민과 여행자 등 누구나 방문할 수 있게 무료로 개방했다. 바이오다이내믹 농법과 가드닝 기술을 적용 및 수행하고,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 40년 전부터 재단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정원 전체를, 즉 자연 그대로를 완성된 유기체로 간주하고 인위적인 인간의 도움을 최소화하여 생태계가 스스로 안전과 건강의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자연과 함께 인간의 즐거운 삶을 영위하자는 미션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이 참 귀감이 된다. 


붉은색, 자줏빛, 노란색 그리고 오렌지 빛깔이 한 데 어우러져 있는 꽃밭에서 로젠달 가든의 여정이 시작됐다. 가을의 문을 여는 자태로 짙은 채도를 띤 채 빛나는 꽃에서 매혹의 향기가 났다. 여러 채의 그린하우스가 정렬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안온함을 자아냈다. 온실의 따스함, 투명창을 뚫고 들어가는 햇살, 투명창을 뚫고 나오는 화분과 허브의 푸르름이 자연에 잘 녹여져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고 나직이 공간을 채우는 그들의 대화 소리는 부드럽고 은은했다. 그린하우스 내부 공간은 각양각색의 이름 모를 화분과 꽃, 나무와 허브로 가득 차 있었다. 덩굴 식물로 에워싸인 투명한 벽과 천장 곳곳은 바깥의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낮엔 내리쬐는 햇살 샤워받으며 허브차를 곁들인 브런치를 즐기고, 밤엔 쏟아지는 별빛 세례를 받으며 와인과 대화를 즐기는’ 상상을 했다. 공간이 건네주는 감동과 영감의 크기가 너무나 큰 나머지 바깥 자연을 잠시 잊은 채 가만히 앉아 또 하나의 자연을 만끽했다. 


정원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바깥으로 향했다. 어느 곳으로 향해도 나무와 풀과 꽃이 그들만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분명 조성된 정원일 테지만 인간의 손길을 최소한으로 한 흔적이 역력했다. 한편으론 이곳에 종일 머물며 온갖 좋은 것을 누릴 생각을 하고, 정원을 가로 세로 질러 다니며 모든 기운과 영감을 다 훔치고픈 마음으로 가득한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조명해 보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보다는 자연을 내 입맛대로 즐기고 싶어 하는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에 굴복한, 한낱 나약한 인간의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젠달 가든이 바라고 소망하는 지속가능성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됐다. 정원 그 어디에도 버려진 쓰레기가 없던 점과 대화를 자제하고 자연과 교감하려는 방문객들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작은 실천이 갖는 좋은 에너지가 얼마나 빠르게 전염될 수 있는지도 체험할 수 있었다.

허브티를 한 잔 사들고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린 속도로 정원을 거닐었다. 목적 없이, 방향 없이 유영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길을 잃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도통 길을 잃는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이 시대의 여행자에게 로젠달 가든은 완벽한 곳이었다. 넓고 방대한 자연 공간이지만 아름다움과 안전함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었고 다람쥐처럼 이나무 저나무를 옮겨 타고 다니고 싶었다. 점점 자연은 ‘자유’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비밀스러움을 가득 머금은 듯한 좁은 길을 만났을 땐 내 키를 훌쩍 넘긴 식물벽에 기대어 속마음에 있는 아무 말이나 소리쳐 내뱉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사람보다는 자연이 들어주면 한결 고백이 편안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정원의 이곳저곳을 누빌수록, 나무와 꽃과 길 그리고 하늘과 바람과 애정을 주고받을수록 영혼이 쉼을 얻어갔다. 별생각이나 기대 없이 그저 찾아왔을 뿐인 나를 지극정성으로 환영해 주는 느낌을 받고 나니 그동안 짐짓 모른 척했던 내 몸과 마음의 안위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은 아주 능수능란하게 내 영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던 거다. 좀 들여다보라고, 토닥거리고 쓰다듬고 만져 주라고. 겸연쩍으면서도 용케 솟아나는 에너지에 힘입어 나 자신에게 몇 마디 건넸다. 부족하다는 마음은 잠시 거두자고, 열심히 살았노라고, 잘 떠나왔다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긴다면 내일의 삶은 더 충만할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나이라는 게 대체 뭐라고, 살아보니 정말 별 거 아닌데 그리도 신경 썼을까 싶지만 서른여섯의 끝자락에 있던 당시엔 참 쓸데없는 고민이 많았다. 별로 개의치 않고 너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피드백이 꽤 있었지만 내면의 두려움과 나만의 고민은 분명 존재했다. 그즈음의 나이가 ‘어른의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시작하는 때인가 싶기도 했다. 성숙을 향한 갈망과 여전히 철부지이고 싶은 내밀한 마음 사이의 갈등, 성공을 향한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기적처럼 시작된 새로운 사랑과 관계를 향한 막연한 두려움까지. 다 꺼내어 이곳에 흩뿌리고 가자는 마음이 들었다. 


산책인지 고해성사인지 모를 느림보의 걸음걸음을 옮기고 나니 새로운 풍경이 고개를 내밀었다. 선홍빛으로 익은 사과가 탐스럽게 달린 사과나무 여럿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무 아래로는 생기를 잔뜩 머금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와 잔디 들판은 마치 서로 경쟁하듯 ‘나를 봐달라’라며 햇살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연은 결코 조용히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실감한 풍경이었다. 사과나무 아래 당장 드러눕고 싶었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먼발치에 있는 벤치에 앉아 괜히 허공만 바라보다가 문득 가방 안에 스카프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 나무 아래로 성큼 향해 스카프를 촤라락 펼친 후 바닥에 깔았다. 신발을 냉큼 벗어던지고 일단 앉았다. 앉아서 하늘을 한 번 바라본 후 심호흡을 크게 했다. 격렬한 행복감을 느끼며 드러누웠다. 나무 줄기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풀내음과 사과 향기가 한 데 섞여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누워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제법이었다.

마침내 ‘진정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기분이 짙게 들면서 하루가 선물이자 축복으로 여겨졌다. 스톡홀름과 나 사이에 묘하게 존재했던 긴장과 탐색의 기운이 막을 내렸고, 여유와 흥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여행의 하루나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돈보다 귀한 시간인데 나를 위한 ‘여행 속 휴가’로 하루를 할애했다는 게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여행 속에도 때론 휴가가 필요하다. 분주한 발걸음과 기민한 감각, 빠르고 거침없는 도전과 영감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도 물론 소중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여행에서야말로 나에게 ‘자유’와 ‘휴가’를 허하자. 과감한 결단과 스스로를 향한 과하다 싶은 애정이 필요한 허용이지만, 내게 선물한 휴가는 분명 여행의 어느 시점에 내게 보답을 건네주었다. 체력과 에너지로, 때론 여유와 인내로, 또 다른 때에는 성찰과 아이디어로. 로젠달 가든과 휴가가 건네준 지혜와 깨달음을 결코 잊지 않고 간직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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