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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May 16. 2024

디너 3시간 - A Calm Festival

셰프만 외제, 모든 식재료와 와인은 로컬에서

어둠이 살포시 내려앉은 도시의 고요한 기운은 다정다감하다.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활기와 에너지도 좋지만 차분한 밤의 에너지가 더 포근하게 마음을 감싸 안아 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밤에 타는 트램이 더 낭만적인 걸까. 2019년 가을 늦은 저녁 쇼텐펠트길 어귀 정류장에서 46번 트램에 올라탔다. 20여분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곱게 차려입고 힐까지 신은 바람에 밤의 낭만을 만끽하기로 한 것. 밤이 오면 더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빈의 거리엔 조명이 간간이 있을 뿐 그 밝기마저도 충분치 않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어둠이 어둠으로 머무를 시간과 공간을 주었기 때문 아닐까 싶더라. 여백의 미. 그래야 빛과 공간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거 아닐는지. 트램 창밖의 풍경은 그저 거리와 건물일 뿐임에도 잠시나마 현재와 동떨어진 시간대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무도회로 향하는 마차를 얻어 탄 기분이라고나 할까.


도시를 거닐고 누비다 보면 저절로 주소가 외워지곤 한다. 구글맵을 늘 들여다봐서이기도 하지만 숫자가 단순할 때나 활자의 조합이 어여쁠 때, 혹은 읽을 때 음성이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 때 기억 속에 각인된다. 어느 맑은 날 밤 호텔이 있는 쇼텐펠트길에서 트램을 타고 레스토랑 데발(DEVAL, 이하 데발)이 있는 도블호프길로 향했다. 주소 속 숫자로만 본다면 1070 Wien(빈)에서 1010 Wien으로 이동한 셈이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호텔 이름과 더불어 주소를 외워두는 게 여행의 습관이 됐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든 곳은 종류와 장르 불문하고 역시 주소를 기억해두곤 한다. 종이 지도와 메모에 의존해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썩 괜찮은 습관 아닌가 말이다. 못잖게 지키는 습관은 유럽 거리 곳곳의 표지판에서 혹은 건물 벽에서 거리의 이름을 챙겨보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길’ 위에 있는지를 인지하고 싶은, 작지만 내밀한 즐거움이 있는 욕망이자 나만의 여행 방식이다.


오스트리아 파인다이닝을 빈에서 꼭 경험하고 싶었다. 데발을 찾기 한 해 전 미슐랭 1 스타였던 콘스탄틴필리푸(Konstantin Filippou)에서(지금은 2 스타를 받았다) 황홀한 점심을 경험했지만, 좀 더 오스트리아 색을 지닌 곳 혹은 특유의 스타일을 지닌, 작고 비밀스러운 곳을 경험하고 싶었다. 넉넉한 시간과 마음으로 열심히 찾던 중 발견한 곳이 바로 레스토랑 데발이다. 당시 레스토랑을 연지 1년밖에 안 된 곳이었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호기심을 가진 채 구글링을 하며 몇몇 미디어에 노출된 셰프의 인터뷰 및 기사를 몇 읽었고, 이어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그만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모든 활자를 읽어 버렸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은 첫째로 레스토랑 이름 ‘데발’은 오너 셰프의 이름 중 성(姓, de Val)이자, 데발(DEVAL)의 첫음절 D는 본인의 이름인 단(Daan)이고, 두 번째 음절 E는 아내의 이름 Evelyn(이하, 에블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름의 의미는 늘 궁금한 법. 발걸음 하기 전 이름의 의미를 미리 알게 되니 왠지 좋았다. 훌쩍 친해진 기분도 들고 말이다.


흥미로운 점 둘째로는 본인을 제외한 ‘모든 것의 출처가 오스트리아’라는 사실이다. 말인즉슨, 본인만 네덜란드 태생이고, 모든 와인과 식재료는 오직 오스트리아에서만 공수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데발을 처음 찾은 날 저녁 셰프님은 ‘저만 빼고 모든 게 오스트리아 로컬입니다’라며 넉살 좋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 에블린도 오스트리아 태생’이라면서 농담 섞인 한마디를 덧붙이며 익살스럽게 그녀를 소개했다. 곁에 있던 연인이 ‘셰프님만 외제네’라고 한마디 넌지시 던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던 순간을 기억한다. ‘셰프님이 외국인이기에 크리에이티브와 탁월함이 그의 요리에서 더욱 돋보였던 건 아닐까’ 훗날 생각했다. 유머 섞인 인사로 편안한 시작을 열어주는 셰프님의 섬세한 터치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뱉어냈다. 다정한 미소가 일품인 에블린은 홀의 모든 것 그리고 레스토랑의 생명수와도 같은 와인을 책임지고 있었다.


2022년 데발을 3년 만에 다시 찾았을 때 여전한 모습의 셰프님과 에블린을 볼 수 있어 감동적이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친 후인지라 웬만하면 유럽의 모든 것이 다 감동으로 다가올 때였지만 반가움이 남달랐다. 그저 우리만의 추억이 깃든 반가움이긴 하지만서도. 예약 확인을 하고 자리를 안내받으며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는 말을 수줍게 건넸는데, 에블린은 바로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거 아닌가. 결코 미안해할 일이 아닌 데다가 우리만의 반가움을 표한 인사라 했더니 그녀는 예의 그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찾아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주었다. 고백하건대 한 번 더 데발에 발걸음 하게 된다면 그때엔 에블린이 우리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우리가 좋아서 또 찾을 일이겠지마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약간의 아쉬움이 피어오른다. 다시 만날 땐 더 유난스럽게 아는 척을 좀 해보련다.


데발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지만 크지 않다. 1층엔 테이블이 오직 여섯 개뿐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길래 물었더니 2층에도 오직 여섯 테이블만 있다고 한다. 작은 규모와 낮은 조도, 짙은 검은색을 띤 테이블과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는 은빛 커트러리, 그리고 공기의 밀도를 가득 채운 다정함이 만들어낸 분위기는 다름 아닌 아늑한 ‘집’이었다. 파인다이닝과 집은 사뭇 대조되는 느낌인가 싶다가도 어쩌면 세상의 모든 레스토랑이 목표로 하는 궁극의 느낌은 ‘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 ‘집’은, 그러니까 ‘집’이 주는 느낌은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지닐 테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집이 주는 환희와 안온함을 생각하면 집을 겨냥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집이 안겨 주는 아늑함과 안전함 혹은 평온함을 데발의 공간, 미식 그리고 서비스에 보이지 않게 녹여내기 위해 고민하고 설계한 흔적을 발견한 듯해 기뻤다. 나 혼자 간직한 은밀한 기쁨이었지만.


편안함과 아늑함이 얼마나 강력한 매력인지는 3시간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더 실감했다. 고도의 몰입과 극강의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의식하지 못했을 만한 길이의 시간이 아니잖은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던 음식과 식재료의 독특한 조합, 재밌는 스토리텔링과 정성스러운 서비스 및 새로운 경험에 대한 만족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단 하나도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연인과 함께 3시간의 여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며 호텔로 돌아갔다. 짐작컨대 데발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여러 포인트 중 하나는 ‘소스’다. 빵을 찍어 먹으라며 내어준 서너 가지 종류의 소스와 튀김 요리를 얹은 접시에 부어주던 묽은 소스, 생선 요리와 스테이크에 곁들여준 소스까지 모두 특이하고 특별했다. 과연 빵과 조화가 괜찮을까 싶은 비주얼과 향을 가진 소스는 '기대 반 염려 반’이었는데 맛을 본 순간 기우임을 깨달았다. 향신료나 채소, 과일, 허브 등이 묘하게 어우러진 소스의 맛은 충격적일만치 훌륭했고, 그 비밀을 알고 싶었다. 한 스푼 남짓의 소스가 요리 전체를 견인하는 힘을 제대로 느낀 경험이었다.


2019년엔 빵에서부터 디저트까지 모든 코스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고, ‘각’이 잔뜩 잡혀 있었다. 셰프님이 테이블마다 다니며 친절한 설명과 이야기를 건네주었고 에블린은 스몰토크와 와인 소개를 담당하며 최강의 호흡을 보여주었던 것. 3년 후 다시 찾았을 때 데발의 분위기는 분명 달라져있었다. 무엇이 그 ‘다름’을 이루어냈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더 집중했고, 관찰했다. 가장 큰 변화는 셰프님과 에블린의 태도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었다. 더불어, 그 영향인진 모르겠지만 스태프들과 손님들의 옷 차림새가 무척 캐주얼했다. 마침 우리도 전과는 달리 캐주얼한 차림새로 발걸음 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셰프님은 더 이상 테이블마다 다니며 살피지 않았다. 대신, 마치 무대에 선 희극인처럼 홀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스탠딩코미디와 연설의 중간쯤 콘셉트로 모든 코스 소개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연령, 인종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미식을 즐기고 있던 차 같은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리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야기는 즐겁고, 음식은 맛있는 데다가 새롭고, 와인은 훌륭한 풍미를 더해주니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순간이었다. 나른하고 편안한데 지루할 틈은 없었고, 즐거움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입 안에서도, 정신에서도 틀림없이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차분함과 편안함은 여전했다. 축제의 사전적 의미는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다. 의미대로 큰 규모의 행사이기 때문에 평소의 삶이라면 찾아가고 참여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감동에 복받쳐 마음은 일렁이고, 입과 혀에서는 가히 아름다운 난리가 벌어지니 ‘축제’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거다. 이토록 작고, 편안하고, 차분한 행사라면 며칠밤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데발이 파인다이닝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궁극적으로는 ‘집을 표방하는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왜’ 받았는지 이윽고 깨달았다.


뭐든지 일단 상상해 보고 짐작해 보는 건 재미지다. 꽤 편안해 보이는 셰프님 그리고 데발의 분위기, 공기에 흐르는 가벼움과 산뜻함을 느낀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며 컨셉이나 전략 등을 근본적으로 변경한 게 아닐까’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층 힘을 뺀다는 건 오랜만에 찾은 고객을 ‘팬’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힘을 잔뜩 주고 있을 때보다 힘을 좀 빼고, 복잡한 건 좀 내려놓고, 스스로를 믿고 갈 때 ‘본연의 매력’이 더 드러난다는 걸 체감했다. 중심이자 핵심인 ‘음식의 퀄리티와 만듦새’ 그리고 ‘진심과 정성’이 흔들리지 않는 한 어떤 도전과 변화도 가능하고 또 성공적일 수 있다는 걸 방증한 셈이다. 크리에이티브와 탁월함 그리고 '다름'의 근원은 결국 ‘끊임없는 시도와 도전 그리고 빠른 실패’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당연한 귀결에 다다랐다. 머나먼 타국에서 누군가의 변화에 감탄하며 영감을 받고 용기를 얻었다.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는 건 물론이다. 급기야는 데발의 팬이 되어 진심으로 데발 셰프님과 에블린을 응원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행과 미식 그리고 경험의 방정식이 건네준 선물이다.


세상은 넓고 와인은 많다. 과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얼마나 다양하게 와인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을까? 여행이 그리울 때 가고픈 나라의 와인을 한 잔 하는 것도 제법 괜찮은 방법이다. 프랑스가 그리울 땐 브런치주로 샤블리(Chablis) 한 잔, 오스트리아가 그리울 땐 저녁 식사에 곁들여 츠바이겔트(zweigelt) 레드 와인 한 잔 하는 거다. 이탈리아가 그리울 땐 깊은 밤 오페라 LP 한 장 꺼내 턴테이블에 올리고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레드 와인 한 병 찬찬히 마시는 것도 좋겠다. 와인과 음식 페어링의 즐거움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침 없는 큰 즐거움이지 않나. 건강만 차치한다면 실은 매일 경험하고 싶은 극강의 재미인 것.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인생 최고의 페어링은 역시 데발에서 경험했다. 6코스의 식사 동안 식전주부터 디저트주까지 총 6잔의 와인을 최고의 음식과 함께 내주었다. 오스트리아 동서남북에 위치한 각각의 빈야드(vineyard)에서 공수한 와인을 맛과 향의 궁합에 맞게 짝지어 준 것이다. 짙은 황금빛을 내뿜는 빈티지 화이트와인의 쿰쿰함에서 시작해 진한 타닌이 매력적인 검붉은 레드와인을 지나 살구빛 디저트와인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 와인 세계에 풍덩 빠졌다가 헤어 나왔다.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미식의 경험, 그 찰나의 순간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생각과 감정에는 한계가 없다. 오감, 아니 육감을 동원해 자극에 반응해야 함은 물론 뇌의 뉴런까지 일제히 깨워 눈앞의 상황이 내게 건네주는 모든 것들을 흡수해 볼 필요가 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쌓일수록, 손끝이 여물 듯 감각이 여물 수록 고밀도 고강도의 충만한 여행을 할 수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엉뚱함을 불러일으키는, 벅찬 감동과 낯선 새로움으로 둘러싸여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은 바로 ‘미식 경험의 현장’ 아닐까. 별이 빛나는 미슐랭 스타 파인다이닝이야말로 단연 최고의 경험이었지만, 결국 더 오래 세밀하게 추억하는 건 여전히 '데발에서의 3시간’이다. 오래전엔 몰랐지만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레스토랑 데발 2층에 12명을 위한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 여행과 미식을 애정해 마지 않는 사람들과 모여 데발에서의 황홀한 3시간을 함께 만끽하는 꿈을 꾸게 됐다. 아름다운 도시 ‘빈’의 맛이 과연 무어냐 물으신다면? 꼭 데발로 향해 찾고, 맛보고, 만끽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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