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Amsterdam)
암스테르담스러움이란 과연 무얼까. 개성과 매력은 뚜렷한데 도저히 정의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이 마음을 어찌하리. ‘암스테르담은 혼돈이다 ‘라고 한다면 삐뚤어진 애정일까? 그보단 애틋한 여운이다. 암스테르담을 향한 그리움은 다름 아닌 그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역동과 혼돈이기 때문이다. 무국적으로 섞여 있는 역동과 혼돈이 분명 무질서한데 이상하게 싫지가 않다. 그뿐만 아니라 금세 그 혼돈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간다. 혼돈의 중심엔 비밀스러운 질서가 있다.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마지못하다는 듯 진면목을 드러낸다. 오래된 것들로 둘러싸여 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할 뻔한 매력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울퉁불퉁하고 좁은 돌길과 어여쁘게 흐르는 운하가 만들어내는 정취를 채우는 공기엔 시끌벅적한 자유와 호기심의 냄새가 난다. 도시는 고풍스러우면서도 꽤 모던하고, 우아하면서도 자유분방하다. 시크하지만 뜨겁고, 빠르지만 여유롭다.
7년의 간격을 두고 만난 암스테르담은 달랐다. 그런데 도시가 달라진 건지 내가 달라진 건진 알 길이 없다. 비행기를 놓쳐 하루 늦게, 혼자만의 여행으로 만났던 암스테르담은 모든 게 새로웠다. 아는 것도, 기대한 것도 없었기에 압도적이었다. 실체는 모르지만 늘 찾아 헤맸던 ‘낯선 느낌'으로 가득했다. 중후하고 묵직한데 젊고 감각적이란 말이다. 오래된 것들로 가득한데도 묘하게 새롭단 말이다. 오래된 것들이 근간이 된 크리에이티브가 빛나는 곳이다. 어둡고 기괴하면서도 밝고 반짝이더란 말이다. 오밀조밀 아기자기하면서도 풍채와 위엄을 갖추고 있고 말이지. 도시 산책을 위해서는 건축과 디자인에 쉴 새 없이 매료될 각오가 반드시 필요하고 말이다. 모든 것에 한껏 열려 있는 마인드가 도시 곳곳에, 사람들 사이에 배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존심도 세고, 오지랖도 넓고, 다정다감도 넘치고, 활력과 열정도 가득해 보인달까.
7년 만의 재회는 연인과 함께 했다. 다시 만난 나로서는 본능적으로 '이전과 무엇을 다르게 느낄까’의 앵글을 장착했다. 첫 만남인 연인에게 과연 어떤 곳일지 은밀히 궁금해하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에게도 암스테르담은 ‘혼돈’이었다. 물론 내게는 매력이었던 그 혼돈이 그에게는 매력이라기보다는 문자적 의미를 갖는 혼돈이지만… 만일 세계 최고 수준의 커피와 다채로운 다국적 음식의 향연 그리고 콘체르트허바우의 음악이 없었다면 암스테르담과 연인 사이는 더 아슬아슬하지 않았을까.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긴장감이 되려 곁에 있는 내게는 제삼자의 시선을 가지고 도시를 낯설게 감각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말이다. 혼돈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 또는 그런 상태’.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본 순간 동공에 즐거운 지진이 일어난다. 마음속에서는 설렘의 파동이 느껴진다. 혼돈이 매력인 이유가 이미 ‘정의’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만나면 사고의 범위가 확장된다. 선명한 구분 따위는 버려둔 채 희미한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있지만 ‘이곳은 어디인가’라는 생각으로 여행 속 하루가 귀결되곤 한다. 암스테르담의 특징을 벼린 언어로 표현하는 건 여전히 내게는 불가능한 과제다. 다만, 사람으로 묘사해 볼 순 있겠다. 맥시멀리스트,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외향인, MBTI는 왠지 ENFP, 트렌드세터이지만 나만의 스타일로 소화시켜야만 하는 고집을 지닌 사람.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서 선을 긋기보다는 정신없이 이곳저곳의 경계를 넘나드는 취향을 추구하는 사람. 솔직하지 못할 바에야 말을 아끼고 마는 사람. 남 신경 쓸 시간에 춤이라도 한 번 더 추고 마는 사람.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되 즐거움을 위한 활동에서 반드시 크리에이티브적 인사이트를 얻어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
도시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7년 후에 또 만나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 섞인 느낌이 든다. 만나면 더 영글어 있을 것만 같은 확신과 기대감이 들어서일까. 이 도시를 거닐고 누비다 보면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들 사이사이로 급진적인 표현주의 양식의 산물이 공존하며 뿜어내는 묘한 분위기와 자주 만나게 된다. 예술과 무역으로 흥해봤던 역사를 지닌 도시답게 화려하고 웅장한 밑바탕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비정형의 그림과 색을 덧입혀 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 도시에 계속해서 덧입혀질 그 덧칠이 어떻게 진화할지 무척 궁금해진다. 단 하나도 비슷한 모습을 한 건물이 없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발걸음을 재촉하기보단 늦춰야 하는 돌길 덕에 위아래 앞옆을 수시로 살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디테일을 발견하는 기쁨을 보너스로 얻으니 빠르고 효율적인 여행은 불가능하다. 느릿느릿한 비효율을 추구하며 ROI(투자 대비 수익률)를 내던지는 내 여행에 제격이 아닐 수가 없다.
도시의 면적이 서울의 1/3이고, 길의 중앙엔 운하가 흐르는 데다가 오래된 건축물이 많아 보수 작업이 늘 있다 보니 걷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지면이 고르지 않은 돌길은 걸음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여유를 선사해 준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햇살 아래 운하가 반짝이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자전거 행렬이 이어지고 난 후엔 형형색색으로 꾸민 창문이 예술 작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커튼을 달지 않고 창문을 깨끗이 닦는 데 신경을 쓴다는 네덜란드의 창문 문화(?) 덕에 볼거리가 많다. 두 번째 만남 전 만화책 ‘먼 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을 읽으며 여행을 앞둔 기분을 만끽했었다. 책에서 말하길 과거 네덜란드 주택법 상 주택의 면적이 아닌 주택이 도로에 접한 면적에 따라 세금이 결정됐다고 한다. 자연스레 절세를 위한 방법을 찾게 되면서, 면적은 최소한으로 하되 층을 높인 건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지독하게 개간한 땅이고, 그 중심은 암스테르담이니 땅이 얼마나 귀했을까. 그러니 다닥다닥 인접해 있고, 안팎으로 계단이 가파른 데다가 창문은 집에 비해 많고도 크다. 과연 1층의 창문은 커튼도 없이 왜 그리 활짝 열어두는가 했더니 중세시대부터 내려온 역사와 종교의 영향이라고 한다. 하늘에 한점 부끄럼 없는 생활, 숨길 것 없는 순결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남들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당할 만큼 삶의 정직성을 중요시했던 시대의 흔적이 바로 창문의 크기와 깨끗함의 이유라는 것. 드러내놓고 보기엔 왠지 미안하고 실례인 것 같아 스리슬쩍 본 적이 있다. 한 번 아니고 실은 여러 번. 창이 워낙 크고 ‘나 좀 봐주세요’라는 듯 매력 포인트가 서로 다르니 흥미진진할 수밖에.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 책으로 가득한 벽과 멋진 조명이 여럿 놓여 있는 거실의 모습 그리고 다양한 오브제가 창가에 전시돼 있는 모습까지.
모든 창문이 천차만별 다르고, 모든 건물이 각각의 이유로 모양과 색과 지붕 디자인까지 다른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어떤 안도감인고 하니 ‘달라도 된다, 다를수록 좋다’라는 말을 건네주는 것만 같은 위안 말이다. 암스테르담을 거닐면 거닐수록 ‘다름의 미학’을 한없이 느낄 수 있다. 만약 내가 로컬 사람이라면 어떤 모양과 색의 집에서 창문 곁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지 계속해서 상상해 보게끔 내 마음을 쿡쿡 찔러대더란 것. “다름이 편안하고 익숙하다 못해 다름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산다는 건 어떤 삶일까?” 자주 생각하고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내 삶의 핵심 질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여행에서 이 질문을 꺼내 나름의 답변을 해보는 재미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빈에서, 베를린에서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도 잊지 않고 해 보는 자문자답.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니 계속 던져보는 거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에서의 내 답변은? “다름을 추구하는 감각을 연마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
도시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어가 마음껏 휘적휘적 뛰놀다 보면(아니 걷다 보면) 에너지 타이머가 알림음을 내보낸다. 지금은 다름 아닌 술과 음식이 딱 필요한 타이밍이라는 알림. 도시를 감상하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걷고 또 걸으며 잔뜩 쌓은 영감과 생각을 한데 그러모아 대화로 녹여내라는 알림. 머리와 몸에 쌓인 피로는 미식과 흥취로 인해 쏴악 사라질 것이라는 매혹적인 음성의 알림 말이다. 이제는 그만 걷고, 먹고 마시며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을 찬찬히 내면화시켜 보라는 다정하고 반가운 알림은 놓칠 수도 없거니와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암스테르담은 이 소중한 알림과 음성에 성실하게 응하기에 가히 제격인 곳이다. 암스테르담만의 미식이 무어냐를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에서 온갖 유럽의 미식을 다채롭게, 맛있게 만날 수 있다는 말은 자신 있게 건넬 수 있다.
생애 최고의 빠에야와 크로켓을 경험했던 스페인 레스토랑 파라옐(Parallel)을 잊을 수 없다. 콘체르트헤바우에서 이반 피셔의 열정적인 지휘에 푹 빠져 호텔까지 걸을 수밖에 없었던 어느 밤. 음악의 여운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 무어라도 해야만 했던 그 밤 호텔을 약 3분 남겨둔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던 그 밤. 키친은 주문을 닫았지만 바가 열려있었다. 매니저에게 추천을 받아 파라옐에서 직접 빚은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전율과 감동을 소화시키고 있었다. 산미가 독특한 맥주 맛이 워낙 훌륭해 안 그래도 감탄을 하고 있던 차에 매니저가 다가와 맥주가 어떤지 묻더니, ‘반드시’(2번 강조했다) 음식을 맛봐야 한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 암스테르담에서의 마지막 디너를 파라옐에서 했다. 기대와 상상을 초월한 음식 맛에 와인 없이도 취하는 것만 같았다(물론 와인은 함께였다). 주방과 바에서 흘러나오는 스페인어와 스페인 음악까지 곁들여지니 ‘여긴 과연 어디’ 버전의 행복이 펼쳐졌다. 매니저는 와인을 따라주며 한마디 건넸다. “I told you!” 미소와 눈빛으로 화답한 후 팬에 눌어붙은 빠에야를 박박 긁어먹었다.
호텔 주변의 미식 지형이 심상찮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에만 머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길 건너 무경계 무국적 와인 다이너 OTTO VOLANTE를 빠트릴 수 없다. 훌륭한 추천 덕에 내추럴 와인 레드와 오렌지를 음식과 함께 맛있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린 예상 밖의 즐거움은 바로 굴과 김치였으니. 메뉴명은 ‘Oysters with kimchi’였다. 호기심이 발동돼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바람에 애피타이저로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안 어울릴 수가 없고, 안 맛있을 수가 없는 조합인 걸 우리는 이미 잘 아는 한국인이잖은 가. 와인과의 페어링도 훌륭했고, 무엇보다도 김치의 맛과 향이 오리지널과 매우 가까워 놀라웠다.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연인은 ‘우리는 마침 한국에서 왔는데, 김치맛이 너무 훌륭하다. 직접 담근 건가요?’라 물었다. 매니저는 그렇다고 하더니 주방엘 급히 다녀왔다. 셰프님이 유튜브를 보며 연구했다는 거 아닌가. 반갑고 재밌고 대견한 마음이 들어 찬사를 건넸다. 우리도, 홀도, 키친도 모두가 환하게 웃는 순간이 연출된 것.
암스테르담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즐거운) 미식’ 덕에 저녁만 되면 모든 걸 잊고 즐거움에 사로잡혔다. 어느 날 우연히 발걸음 한 브런치 카페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프랑스식 크로크무슈와 카페오레, 프렌치프라이를 맛보고 기운과 기분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었다. 영원히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이름의 카페 스휘르마놈켄스흐라소티(schuurmanoomkensgrassotti)에서의 ‘마살라 오믈렛 번’도 잊을 수 없다. 분명 번이 있었는데 없었던 부드러움, 인도의 마살라를 만난 오믈렛이 충격적으로 맛있는 나머지 '이건 암스테르담이야'라는 생각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던 추억. 세수도 안 하고 연거푸 이틀에 걸쳐 먹으러 갔던 열정과 의지가 참으로 대견하다. 지중해 요리 레스토랑인 나이트 키친에서 맛본 ‘깔라마리’라는 이름의 요리는 이국적이다 못해 황홀했다. 사워크림 위에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럽게 조리한 적양배추와 구운 깔라마리를 얹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음식이었다. 느낌상 꼭 밤에 먹어야만 하는 어른의 요리 같았달까. 이름에 걸맞은 느낌을 느끼도록 내어주는 요리라니, 아니 즐거울 수 없잖은가.
생각해 보면 여행은 부러 불확실함 속으로 뛰어드는 일 아니던가. 2023년 가을 암스테르담과의 재회에서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소설 <푸른 세계:너의 혼돈을 사랑하라>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불확실함과 혼돈을 멀리하려는 마음이 피어날 때마다 손이 가는 소설이다. “(…) 실제로 너는 그것을 사랑해야 하고 그뿐 아니라 사랑한 다음에 그것을 확장시켜야 해. 각자의 삶이 자신의 혼돈이지.” 사랑해 마지않을 뿐만 아니라 ‘확장’시키라니. 서글프게도 아름다운 말이다. 도시 여행에도 장엄함이 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순간을 만날 때도 있고, 가슴 깊이 새겨둔 한 구절이 떠올라 환희의 눈물이 날 때도 있고.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확실함은 내팽개치고 불확실함으로 뛰어들고 싶을 때도 있고. 불현듯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주저치 말고 암스테르담을 만나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