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를 읽고
늦게 만나 아쉬운 책이라 하고 싶다.
이 책, 참 정감 있고 친절한데, 깊이와 물음이 심상찮다.
문학과 철학적 요소가 근간이 되어, 서사와 사유 그리고 경험이 얹어진 매력적인 글로 채워져 있다.
여행에 주제가 되는 에세이를 적잖이 좋아했던 나로서는 꽤 많은 글을 읽었던 것 같은데도, 인제야 어쩌면 가장 찾아 헤매던 책을 만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이 책이 안겨다 준 생각과 느낌을 끄적여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나마 스스로 이 질문을 던져본 적은 더러 있었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몇 번이고 스스로 물어왔지만 글로 옮겨보고 정리해볼 엄두는 못냈던 듯싶다.
매번 느닷없이 두서없이 하지만 꽤 자연스럽게 어느 때가 되면 그 무언가 영감이 휘몰아치면서 그저 떠나고 싶은걸 어쩌겠는가.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나는 그곳에 있어야 했고, '지금 당장' 그래야 했다."(p.51). 여행을 애정해마다않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상황이라해보자면 난 여행에게 아마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까 싶다. "네가 필요해", 라고. 로맨틱한 고백은 아닐 수 있겠다.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의 여행에게 친근하게도 계속해서 물어오는 저자의 도움으로 마음껏 심연으로 들어가 생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물을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왜 하는지, 여행은 대체 내게 무엇인지.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잠시간의 여행이 늘 필요해진다. 그 일상이 늘 괴로운 게 아님에도, 뭔가 다른, 더 새로운 '일상'을 짧게라도 갖고 싶다. 조금 더 어릴 적엔 여행을 동경하기만 했었다. 여행하는 중에도 말이다. 그런데 어느덧 삶에도, 여행에도, 연륜 비스름한 게 쌓이기 시작하다보니 나만의 취향과 스타일이 확고해지고, '어떤 여행'이 필요하겠다!를 몸소 느끼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떠나지 아니할 수 없고, 그 필요한 여행의 전후가 여정 못잖게 즐겁다.
p.19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여행이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행이 왜 좋으세요?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나는 차근차근 여행의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마음먹었다. 여행지에서, 여행에서 돌아와서, 여행을 준비할 떄도 항생 여행을 생각하고 글을 쓰며 여행에 대한 생각을 모았다. 그결과, 나는 적어도 내게 여행이란 무엇인지만큼은 알게 되었다.
지난 내 모든 여행을 떠올려보며 읽어나가 보았다. 난 무엇을 얻었을까? 떠오르는대로 끄적여볼까. 먼저, 무엇인가를 얻었다기보단 여러가지 것들을 '해소'했다. 말인즉슨, 흠모했던 유럽의 여러 도시를 직접 보고, 만지고, 밟아보고 싶었던 호기심을 해소했다. 머나먼 낯선 곳에 나를 홀로 떨어트려 놓고 싶었던 (고독을 향한) 갈망을 해소했고, 여행자라는 특권을 빌려 일상을 재미있게 꾸려 나가는 시도를 기왕이면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욕심을 해소했다. 소소하게 연습했던 현지 언어를 기회가 될 때마다 뱉어냄으로써 작아질 대로 작아져있던 자신감을 해소했고, 누구에게도,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고유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 드러내기 위한 시간을 가지기 위한 (착한?) 이기심을 해소했다. 미처 내다버리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의 찌꺼기들로 인해 쌓였던 답답함을 날려 버렸다. 아울러, 음식과, 음악(jazz)과, 각 도시만의 커피문화와 낯선 환경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나만의 사색을 향한 끝이 없는 욕망을 해소했다. 이 총체적 시간이 안겨주었던 생각과 감정들 그리고 에너지는 총천연색이었다.
p. 44
정말로 우리가 부러워할 만한 여행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 삶을 새롭게 하는 존재방식을 달성한, 그러한 여행을 통해 늘 삶의 힘을 얻는 소수일 것이다. 진정한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자기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얻는다. 그들은 타인들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기 삶을 자기의 것으로 형성해나갈 수 있는 힘을 여행이라는 현실 속에서 발견한다.
'진정한 여행자'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글로부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여행을 다녀옴으로써 타인과 환경에 절대 구애받지 않고 만끽하며 느꼈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받쳐 오르는 감정과, 여행의 이시간 저시간, 이곳저곳에서 켜켜이 쌓아온 사색과 고민의 흔적들만으로도 '그래, 이거면 됐다'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바로 '자유'가 아니었을까 싶어서이다. 그것이 자유였다고 말하기가 어쩌면 두려웠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이지 '나만의 여행'을 더 힘차게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p.85 결국 여행은 돌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그 훌륭한 돌아옴을 위해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성찰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중략) 나는 여전히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을 읽는 여정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곳이라 생각한다. 여행이 내 삶에 '가치'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바로 '돌아와서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돌아온 후에 그 여행을 어떻게 일상에 녹여내고, 어떻게 그 마인드와 자세로 다시 힘차게 현재를 살아가며, 그 여정에서 얻은 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면서 또 다른 여행으로 연결해나갈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인 오늘, '바로 지금' 다시 여행을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1cm 성장한 우리네 삶일 것이다. 저자의 믿음대로 여행을 사랑하는 나 그리고 누군가는 삶을 바꿀 수 있다, 고 나 또한 기대한다.
p.148 삶은 단계적으로 흘러가며 나이에 맞는 미션을 수행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그저 삶을 한걸음 물러나서, 추상적으로 바라볼 때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삶은 오늘에 밀착할 때만 발견된다. 있는 것은 오직 오늘 뿐이다. 그리고 매일 오늘을 살아 내다 보면, 그 다음에 부수적으로 '전체 시간'으로 그 오늘들이 묶이는 것이다. 나는 그저 어제와 다르기만 하면 되었다. 어제와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글을 써내면 되었다. 삶도 다르지 않다. 어쨌든 어제보다 나아지면 된다.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가치있는 만남을 경험하고, 새로운 글 한 줄을 백지에 추가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런 '오늘들'이 묶여서 어떤 결과가 나오고, 또 어떤 '오늘들'이 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항상 오늘 속에 있을 것이고, 언제나 그랬듯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최선'이란, 어디까지나 오늘의 삶에 대한 최선이다.
지금까지의 내 여행과 앞으로 다가올 여행 그리고 저자의 '오늘의 삶'에 대한 성찰이 이곳에서 만났다. 수많은 '오늘'이 촘촘히 쌓여 이루어지는 우리네 인생. 그 수많은 오늘이 때때로 '(나만의) 여행'이란 것으로 쌓여나가며 완성되어갈 한 편의 멋진 스토리를 기대해본다. '진정한 나'로서의 오늘들이 쌓여갈 때 '진정한 나만의 여행'이 탄생하리라. 우리 모두의 그리고 나의 '고유한 인생'과 '고유한 여행'을 위하여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