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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Sep 08. 2018

쫀쫀한 각본 위 찰진 연기력

영화 <몰리스 게임> 을 보고

각본가 아론 소킨의 이름과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의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됐던 작품이다.

애정을 가지고 적잖이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오늘 이 영화와 조우했다.

아론 소킨은 영화 <머니볼>, <소셜네트워크>, 그리고 TV쇼 <뉴스룸>으로 만난 각본가이자 (이제는 더 잘 어울리는) 감독이다. 이전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영화 <몰리스 게임>은 구성이 탄탄하게 잘 짜여져 있고, 텐션을 놓칠 수 없는 전개가 아론 소킨의 명석함과 특유의 품위로 표현되었다. 영화의 소재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타 몇몇 요소들을 놓고 보자면 취향과 선택의 이유로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다. 다만 아론 소킨과 제시카 차스테인의 팬들에게는 다시 한 번 그들의 능력과 매력 그리고 범상찮음을 확고하게 증명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울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그리고 실존 인물의 스토리 전개는 언제나 더 박진감 넘치고 진정성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 기본 골격에 아론 소킨의 쫀쫀한 각본과 촌철 대사 그리고 제시카 차스테인의 찰진 연기력이 얹어지니 어떤 지진과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하고 강력한 집이 지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공부면 공부, 스포츠면 스포츠, 못하는 게 없던 유년시절부터 20대 시절까지 몰리 블룸은 완벽에 가까웠다. 프리스타일 스키 올림픽 출전 선수로 촉망받던 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한 번의 커리어를 이미 끝내게 되고, 인생 경로를 바꾸게 된다. 로스쿨 입학을 잠시 미루고 무작정 LA로 향해 학비를 버는 수고를 마다않으며 세상을 경험해나간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의 비서직에 지원하게 되면서, 그녀의 보스가 규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로열 포커 하우스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된다. 처음 맞닥뜨린 세상이기에 신기하고 낯설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세상을, 사람들을 그리고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그 세상을 '이끌게' 되는 존재로 우뚝 솟아난다.


고액 포커 게임인데다가 불법인 듯 불법 아닌 듯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포커 하우스를 운영해나가던 몰리가 상대해야하는 인물들은 모두 강력한 남성들이었다. 이를테면, 할리우드 유명 스타, 재벌 사업가, 재벌 2~3세, 락스타, 금융 인사들, 심지어 러시아 마피아들, 그리고 돈은 많지만 완벽한 루저들까지. 과연 혼자서 이런 일과 사람들을 감당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상상조차 쉬이 되지 않는 스케일의 일이다. 로얄 포커 하우스 운영자로서의 자신감과 품위 그리고 당당함을 결코 잃지 않음과 동시에 소득 신고를 정확히 해나가던 몰리.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진 반면 포커(도박)의 중독성과 손실과 빚을 만회하려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왔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늘 갈등을 해왔던 그녀는 결국 운영과 현금 보유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수수료를 받는 불법을 감행하게 된다. 24시간 돌아가는 게임판의 주인으로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위해 마약에까지 의존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잃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결국 FBI 정보원이었던 하우스 참여 멤버중 한 사람으로 인해 체포를 당하게 되고, 재산을 급작스럽게 몰수 당하고, 저지른 불법 행위 이외에도 정부(검찰측)의 먹잇감이 되어 러시아 마피아들을 잡아 들이기 위한 증거 입수를 위해 위협과 협박(형량 거래)도 당하게 된다. 한 개인이 다 겪은 일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치의 삶의 모든 희노애락과 고통 그리고 바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몰리는 품격,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결코 잃지 않는다. 실수도 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리며 허우적대기도 하고, 마약에 의존하고, 사람들에게 배신도 당하는 등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오류를 내고 또 약해지는 것도 같고 포기하고 싶을 것도 같지만, 몰리는 끝까지 자신의 존엄과 이름을 지킨다. 그녀가 가진 것은 그리고 지켜야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이름'이라 말하면서 말이다.

아론 소킨의 스토리에서는 항상 탁월한 전문가가 등장하고, 그리고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방황을 하고 갈등을 한다. 그런데 언제나 존엄과 품격을 잃지 않는다. 돈과 명예와 사람을 잃어도 말이다. 죽을만치 힘들고 괴로울 사건과 고난 앞에서도 무너지거나 쓰러지는 법이 거의 없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를 명석하게 알아내는 듯하고, 모든 과정에는 good & bad side가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인정한다. 한계가 없는 듯 자신의 역량을 미친 듯이 발휘하고, 할말 안할말을 순식간에 분별하는 것만 같다. 스마트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삶과 사람을 마주하는 태도는 매력적이게도 진지하다. 찌질함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며, 연약함을 자랑하듯 표현한다. 때로는 열정이 신중함을 대체하기도 하며, 마지막엔 꼭 사람을 택한다.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상과 그가 만들어내는 사람은 모두 그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것일까. 한 사람에게서 그 많고도 범상찮은 캐릭터들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에게서 탄생된 캐릭터들이 한 작품에서 만나게 되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기가 막힌 지상 최대의 '설전'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된다.


관전 포인트는 스토리 그 자체요, 몰리라는 존재와 그 삶이지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하면 마치 보상처럼 주어지는 듯한 탄탄한 구성, 그리고 인물들이 쉴새없이 뱉어내는 촌철 대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몰리의 이야기이기에 몰리가 이끌어갈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상당했지만, 몰리와 아빠와의 관계(무려 아빠가 '케빈 코스트너'!), 모든 게 끝난 것만 같았던 상황에서 잔잔하게 나타나 조력자로서의 저력과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준 담당 변호사, 그리고 호탕하고도 유머러스했던 마지막 판사의 판결이 완벽한 시즈닝이 되어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초반엔 마치 강렬한 에스프레소 향으로 내 온 몸과 마음을 깨워주는 듯했다. 은밀한 포커 세계의 긴장과 몰리의 성장과 변화가 탄탄한 짜임새로 쫀쫀하게 그려져 나가는 중반에는 묵직한 스카치 위스키 한 잔을 손에 들고 더 깊은 상념과 몰입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몰리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부닥친 상황들을 하나 하나 신속하게 풀어 나가야 하는 역동적인 순간들이 다가오자 시원한 맥주의 목넘김으로 나를 다시 깨어있게 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긴 러닝 타임이 끝나갈 즈음엔 몰리와 함께 스파클링 와인으로 축배를 들 수 있었다랄까.


'믿고 보는'이란 말에 다시 한 번 새롭게 실감했던 두시간이었다. 여운이 길게 남는 게 있다면 한 인간으로서의 몰리와 틈새없이 완벽하게 직조되어 궁극의 텍스쳐, 온기, 그리고 부드러움을 지닌 채 완성된 캐시미어 같았던 아론 소킨의 스토리 전개다.


매력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오늘밤 펼쳐 볼 감상과 생각이 많아져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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