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지키는 여자, 에바 호프를 읽다
*본 게시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8 공연예술창작산실을 통해 제작된 뮤지컬 <호프>는 제 4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을 수상했다. 세 명의 여성 창작자들을 선두로 만들어진 이 공연은 그간 어떤 곳에서도 다뤄진 적 없는 한 여성 “에바 호프”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 극은 20세기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지키려는 에바 호프와, 원고를 보관하려는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 사이의 재판을 무대로 시작한다. 에바 호프는 일평생 아무런 보답 없이 오직 원고만을 지켜왔다고 한다. 뮤지컬 <호프>는 실존했던 주인공을 통해 인간이 살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강하게 욕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에바 호프에게 원고는 무엇이었을까
에바 호프는 유태인으로 태어나 세계 2차 대전을 몸소 겪는다. 호프의 어머니 마리는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베르트의 부탁으로 요제프의 원고를 지킨다. 어린 호프는 제대로 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유태인 여성이라는 취약 계층 속에서 끊임없이 사회 밖으로 떠밀려진다.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베르트와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는 원고를 탐내는 남성에게 거듭된 배신을 당하며 그는 점점 자신을 가둔다. 어린 시절 마리로부터 원고를 지켜야 한다는 집착을 목격하며 성장했던 호프는 마리의 죽음 이후, 원고에 대한 소유욕에 휩싸인다.
그에게 원고는 무엇이었을까.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라는 이름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던 에바 호프의 이름과 삶을 끄집어 낸다. 뿐만 아니라 신체언어적인 안무와 디테일한 연출을 통해 한 여성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길 위의 나그네”,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등 서정적이지만 전형성을 탈피한 새로운 넘버들은 그의 목소리를 나누고 대변한다.
에바 호프는 인간의 야만적인 혐오 때문에 사회로부터 등한시 당했다. 뮤지컬 <호프>는 절망을 마주한 한 인간의 집착이 실존적 욕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 좀 살자, 라고 외치는 호프에게 원고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화도, 사회 속에 파고들 수 있는 수단도 아니다. 그에게 원고는 하나의 세계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세상 속에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에바 호프도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끝까지 재판에 선다.
-읽히지 못한 인생을 조명하는 방법
뮤지컬 “호프”를 보며 새롭게 주목했던 것은 깊이 있고 독특한 넘버와 빠르게 움직이는 세트였다. 무대의 세트와 조명은 꾸준히 급변했다. 유태인을 가두는 수용소, 경매장,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장소 등 상당히 다양한 장소를 필요로 하는데도 어색함이 없다. 중극장의 규모에서, 서사가 필요로 하는 장소의 특이성을 재현해낸다. 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무대연출을 통해 안무 동작에서 그치지 않고, 극의 분위기 자체에 영향을 미치며 역할을 확장한다.
조명은 관객과 배우가 시선으로 마주치는 접점을 만들어낸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넘버에서 비극으로 물든 붉은 조명은 분위기에 긴장감을 더하고, 빠르게 넘어가는 조명은 억압 속에서 목숨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이들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어린 호프는 자신을 향하는 총구 앞에서 생존을 위해 비밀리에 모의됐던 유태인의 저항 운동을 털어놓는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조명을 통해 끔찍한 광경을 더욱 극적으로 목도한다.
-이곳에 없는 길이, 그곳에 있을까
극은 한 여성이 느끼는 고통과 허무를 훌륭하게 연출했다. 어린 호프의 절망과 원망은 넘버 “길 위의 나그네”를 통해 폭발한다. 자신을 배신한 남성에게 원고의 일부를 빼앗기고 집에 돌아온 호프는 마리에게 총을 겨눈다. 그토록 원망했던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호프는 결국 마리에게 원고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상대의 감정과 사랑을 이용한 무책임한 남성들에게 마리와 호프는 배신당한다. 극은 이 장면을 통해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가족이자, 전쟁과 차별을 몸소 헤쳐 온 두 여성이 잠시 해체를 맞이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원고가 없어도 자신이 에바 호프라는 것을, 살아있는 것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겠다고 외치는 어린 호프는 마리를 두고 떠난다.
벗어나고 싶다던 너는 머물러 있고
벗어나고 싶다던 너는 머물러 있다
벗어나 마리와 어린 호프를 비추는 조명 너머에는 안타깝게 그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호프가 있다. 떠나지 말라는 호프의 외침은 어둠 속에서 간절하게 울린다. 관객은 어린 호프의 방황을 바라보면서, 지난 시절을 작고하는 현재 호프의 슬픔을 듣게 된다. 집을 나온 어린 호프는 무대 곳곳을 떠돈다. 밝은 조명의 포인트는 그를 따라가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현재의 호프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는다. 호프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마리는 원고를 손에 놓지 못하면서도, 호프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호프는 마리의 죽음 이후 집으로 돌아온다. 혼자 남겨진 그는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원고 밖에 없다고 인식한다. 원고의 현존과 소유가 자신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잃은 적 있는 사람은 알아
전부를 잃고 남은 게 하나라면
내 자릴 잃고 내 인생을 망쳐도
그게 내 유일한 세상
호프는 반복적으로 공권력과 다수의 혐오로부터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다. 고난한 시간을 통과한 늙은 호프에게 남은 것은 겨우 원고 하나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것을 공권력에게 빼앗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의인화 된 원고를 붙잡고 있는 호프의 모습은 사회에 원망을 전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을 마지막까지 피력하는 대항의 몸짓이다.
재판 판결을 이후 그는 노래하며 자신의 세계를 상실 당한 감정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뮤지컬 “호프”의 김효은 작곡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일 때 빛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호프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원고로 인해 잃은 것들을 복기하고, 창작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호프
뮤지컬이 끝나면, 오로지 “호프”라는 인물만이 남는다. 실제 에바 호프가 소유하고 있던 원고는 2012년 재판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보관 중이다. 한 인터뷰를 통해 에바 호프는 “원고는 곧 자신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2018년 세상을 떠난 에바 호프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무대 위에서 재탄생한 호프의 삶은 비극이나 슬픔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재판에 서기까지, 호프는 한 번도 삶을 포기한 적 없다. 전쟁의 공포와 가난의 두려움이 엄습해도 에바 호프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을 강구한다. 극 속의 호프에게 원고는 그 자체로 목적이자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희망이었다. 작품은 사회 안에 편입되고자 하며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보여준다. 또한, 그럼에도 공동체나 타인을 향한 인정욕구를 갈망하는 것에 스스로 정체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호프”라는 작품을 만들어낸 세 여성 창작자들과 배우들의 행보가 기대된다. 대중성이라는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과 새로운 서사, 각 넘버가 갖고 있는 작품성까지. 많은 부분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앞으로 여성 창작자들이 만들어낼 다양한 작품들의 수요가 더욱 증가했으면 한다. 이 작품의 뒤를 이어, 여태 읽히지 못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또 관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