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E NEED YOUR VOICE Apr 06. 2020

여성 인물 헌정글, 배우 강말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저주 같았다.”


출처: 무비스트


  내가 강말금 배우를 처음 마주한 건 2018년 정동진 독립영화제에서였다. 정동진 독립영화제에 처음 간 것이었고, 찌든 더위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습기 때문에 흐물흐물해진 팸플릿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힌 것이 기억난다.

  여러 단편 영화들에 이어, <자유연기>가 상영됐다. 배우로서 꿈도 포기하고, 독박 육아에 시달리고 있는 ‘지연’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지연은 연기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희망 같은 연락을 받지만, 무책임한 남편과 상황들에 가로막힌다. 비참한 현실 속에 놓인 지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지연이 내뱉는 무심한 어투와 텅 비어버린 동공이 입술을 꾹 다물게 했다. 순간순간 지연의 얼굴에 서러움과 허망함이 스쳤다. 오디션 장면에서 특기로 준비한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지연의 모습이 꼭 숨을 내뱉는 것 같았다. 아코디언 바람통이 커지다 작아지길 반복할 때, 나도 같이 숨을 내쉬었다.



영화 <자유연기>


  마지막으로 안톤 체호프의 소설 ‘갈매기’ 속 독백을 연기하는 지연의 모습은 단연 앞선다. 내가 보았던 작품 중에 이렇게 뛰어난 독백 연기가 있었나 생각했다. 대사들이 토해지듯 쏟아지면서 고조되는 지연의 감정. 나는 지연과 함께 온몸에 긴장을 하게 되었다. 자유연기가 끝나고, 새어 나온 모유가 노란색 옷 위로 번지는 지연의 모습이 줌 아웃된다. 나는 왜 꿈을 포기하고 부당함을 견뎌야 하는 건가, 넋이 나간 배우의 눈빛이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다음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연을 연기한 강말금 배우가 너무 궁금해졌다. 이런 배우가 있었다니. 지금이라도 이 엄청난 배우를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았던 지연의 모습은 강말금 배우가 아니면 누구도 떠올릴 수 없다. 제일 많은 동전을 받은 작품이 땡그랑동전상을 수상하게 되는 정동진 독립영화제의 전통이 있는데, 나는 <자유연기>의 바구니에 가진 동전을 탈탈 털어 넣었다. <자유연기>가 땡그랑동전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다.

  강말금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서, 그가 연극배우로도 오래 활동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자유연기> 속 지연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졌다. 강말금 배우의 무대 위 모습도 매우 알고 싶어 졌다. 무대 위 그의 연기는 어떨까 상상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첫 계기는 스물한 살 때 무대에서였습니다.
- 마이 데일리 인터뷰 중


영화 <끝에서부터>


  제일 최근에 본 그의 작품은 2011년에 제작된 <끝에서부터>였다. 단순히 강말금 배우의 다른 연기를 보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찾게 되었다. 나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는 주연작을 골랐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갔지만, 자신을 증명할 사원증, 주민등록증도 없어져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희진이 주인공인 단편영화였다. 자유연기와 같은 계절인 여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자유연기> 속 계절감은 정말 푹푹 찌는 더위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고, <끝에서부터>는 땀이 식은 뒤에 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차이는 배우의 연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진이 계속해서 맞이하는 부정들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준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나를 증명할  증서도 가족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희진의 망연자실한 표정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공포감을 안겨준다.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다.
- <찬실이는 복도 많지> 대사 중


  올해 3월에 개봉한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강말금 배우의 첫 주연 장편영화이다. 나는 정식 개봉 전, 홍대 KT&G 상상마당에서 먼저 관람하였다.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여성 감독에 의한 여성 서사인 작품이었고, 강말금 배우가 주연이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가 2020 씨네 뉴 아이콘으로 선정되어 마련된 자리였고 상영 후, GV도 이어졌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실직을 한 영화 pd이자 중년 여성인 찬실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찬실이에게 동화돼서 이입했다. 찬실이에게 벌어진 상황은 극적인 일들의 연속이지만, 찬실이라는 인물과 그의 행동에서 위안을 받았다. 상투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은 이런 위로가 필요했다. 장국영과 찬실이가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볼 때마다 능청스러운 그의 연기에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찬실이와 주인집 할머니가 같이 등장하는 투샷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글을 배우는 할머니가 쓴 시를 읽고 울음을 터트리는 찬실이를 보며 <자유연기> 때와는 다른 울림을 받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최근에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작품이 있었나 생각했다.

  영화가 끝난 후 GV가 진행됐고 많은 질문과 답변들이 오갔다.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당부한 이야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 이곳에 남긴다.


 “극회 활동을 하다가 처음으로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 느낌을 받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근데 못 사는 집이 아니었더라면 연극영화과 갈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무 외모가 평범했기 때문에 어디에 말도 못 했다.

그렇게 해서 펼쳐진 7-8년의 20대는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도 못 컸다, 생각한다. 계속 남 탓을 하고 맨날 술을 먹고 일도 못 하고. 계속 다른 걸 자라나지 못하게, 예를 들어 서른 살쯤 되면 연인하고 결혼을 꿈꿀 수도 있고 직장에서 승진을 할 수 있고. 다른 걸 못 자라나게 막는 것이다. 하나도 안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서른 살에 극단에 들어갔을 때 무언가가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완전 0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더라.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다. 뭐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저주처럼 생각됐다.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책임까지 방기하게 됐다. 그것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많았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친언니가 19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 영화를 봤다. 그리고 ‘찬실이가 나 같다. 아닌가 찬실이가 더 낫나, 나는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라는 문자가 왔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던 것이 과연 저주였던가. 44살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야 하는 언니는 어떤 심정일까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시하고 그것을 향해 가야 한다. 그 주변을 향해서 가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강말금 배우는 주어진 환경과 한계 앞에 가로막히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항상 전형적인 조언으로만 받아들였다. 그가 한 말은 조언이 아니라 경험담 같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그의 태도는 큰 지표가 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 어디서나 찬실이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장국영처럼, 나도 그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낸다. 제가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할게요!



기획·글/ 산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