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끄는 곳
미디어 매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했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영상 매체를 방영하고 소비하는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최근 전폭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플랫폼이 바로 넷플릭스(Netflix)다. 미국의 DVD 렌탈 업체로 시작해 시대 흐름에 맞춰 VOD 플랫폼으로 전환된 넷플릭스는 타 지상파 방송과는 달리 소비자를 모으고 판매하는 시스템이다. 때문에 넷플릭스는 기존 매체와 차별성을 둘 필요가 있었다.
2013년 시즌 1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기점으로, 넷플릭스는 기존 미디어가 갖고 있던 전형성을 탈피하고 다양한 소재의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고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2015년 시즌 1을 시작으로 넷플릭스에서 자체 제작된 미국 드라마다. 주인공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80대 노년의 여성으로, 서로 전혀 맞지 않은 이들이 별장에 함께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상적 이야기를 시트콤 형식으로 풀어냈다. 여성인권은 물론이고 인종, LGBT, 연령 등 사회 이면에서 함부로 간과되어 일어나는 상황과 이야기들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필자는 시즌 1부터 6에 이르기까지 풀어낸 이들의 이야기를 특정 에피소드 중심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만나 사업을 론칭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노년 여성의 삶에 대해 알아본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2020년 현재까지 총 6개의 시즌이 방영됐다. 평탄한 노년을 보내고 있던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어느 날, 두 남편에게서 이혼 통보를 받는다. 사유는 바람. 그들의 남편 솔과 로버트는 이혼 변호사로 함께 일하는 파트너이자, 클로짓 게이로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불륜 파트너였다. 이십 여 년의 세월을 배신당한 느낌에 분노하던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남편을 떠나 두 가족이 함께 구입해 두었던 별장에 동시 입주한다. 취향, 성격 등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 없었던 이들은 원수지간처럼 서로를 미워하지만, 함께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고 의지하며 생활한다.
작품은 시즌 1부터 빠르게 전개된다. 좋은 레스토랑에 모인 두 부부가 본 모습을 드러내며 해체를 맞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 “종말”은, 형식적인 가족의 형상을 깨부순다. 팔십 대 노년의 부부에게 오십 여 년의 결혼 생활은 삶의 족적 그 자체로 의미를 지녔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분노하고 슬퍼한다. 더 이상 남편과 같은 공간에서 지낼 수 없었던 그들은 본래 가정을 꾸린 집에서 나와 다른 공간에 안착한다. 성공한 사업가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레이스,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 프랭키는 결국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고 너무 다름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 함께한다.
*이후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즌 2 8화, “닻”
시즌 1부터 6까지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더불어 진취적인 행보를 점진적으로 담아냈다. 두 여성은 함께 생활하며 과거 남편과 가정에 얽매여 있던 모습을 환복하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낸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서는 단순히 둘만의 삶에 대해서만 조명하지 않는다. 그레이스와 프랭키의 젊은 자식들, 동성 결혼 후 함께 살고 있는 남편들과의 다양한 에피소드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시즌 2 8화 “닻”에서는 프랭키가 시작한 사업으로 인해, 그레이스의 딸 브리아나와 겪게 된 마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프랭키는 질 건조증을 앓고 있는 여성이나 노년기 여성을 위한 질 윤활제를 개발한다. 프랭키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숨겨진 여성의 성생활과 ‘질’에 대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에도 마를 이용해 직접 윤활제를 만들어 사용했던 프랭키는,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는 브리아나로부터 대량 생산 제의를 받는다. 완성된 샘플을 받아보는 과정에서, 프랭키는 대량 유통을 위해 윤활제에 팜유 오일이 함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소 환경 보호에 앞장섰던 프랭키는 오랑우탄의 보금자리를 뺏고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팜유오일이 자신의 제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분노하고, 사업가의 입장으로 불가피한 상황임을 주장하는 브리아나와 갈등을 빚는다.
노년기를 맞은 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갈등은 많은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어 왔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기성세대는 흘러온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직접 검증 받았던 경험치에 대해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이들의 갈등을 단순하고 감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환경 파괴에 분명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팜유오일을 매개체로 프랭키와 브리아나는 세대를 불문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팽팽히 맞선다.
8화 안에 이들의 갈등이 온전히 끝맺어지지 않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었던 프랭키와 브리아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브리아나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업가다. 그는 프랭키를 사업 파트너로 분명히 인지하고, 존중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간다. 프랭키가 노년의 여성이고, 자신이 어머니처럼 따르는 사람이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프랭키 또한 마찬가지다. 사업 경험은 부족하지만 자신의 제품이 신념에 맞지 않고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상황을 직시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가 고집스럽게 비춰지기도 하지만, 굴하지 않는 모습은 전에 없던 인상적인 캐릭터다.
-시즌3 13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바이브레이터 사업을 시작한다. 그들은 이혼 이후 성생활에 대해 되짚어보면서, 노년 여성을 위한 성인용품 시장이 얼마나 협소하고 불평등한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직접 겪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손목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바이브레이터를 출시한다.
그레이스의 사업 기질과 프랭키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통해 성공적인 바이브레이터 판매기록을 이룬 이들은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쳤다. 프랭키는 새로 만나게 된 제이콥과 멕시코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그레이스는 프랭키의 부재로 느껴질 공허함에 대해 생각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정점에 다다른 둘의 갈등 모습과 함께 마지막까지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에피소드 말미, 그레이스는 열기구를 타고 싶다던 프랭키의 바람을 기억해낸다. 그레이스가 가져온 열기구 앞에서 프랭키는 자신의 불안을 털어놓는다. 늙어갈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전혀 다른 환경으로 나아가기에는 두려움이 앞섰던 그는 자신이 자꾸만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레이스는 그의 손을 잡고 열기구로 이끈다. 둘은 너무도 다르지만, 서로가 유일무이하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감정을 공유한다. “열기구도 타고, 산타페도 가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야지!” 라고 말하는 그레이스의 외침은 프랭키를 떠나보내더라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응원할 것을 확신하는 듯하다.
-그들과 함께라면
넷플릭스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처음 봤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노년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도 매우 드물었고, 이야기의 진행 방식 또한 새로웠다. 지나온 세월을 작고하고 회상하는 노인의 모습이 아닌, 현재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간 작품을 보는 눈이 좁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현실의 삶에서도 여성인권운동, 환경보호운동, LGBT 등 다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 배우 제인 폰다와 릴리 톰린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그레이스 앤 프랭키> 각본에 참여하며 겪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투영했다고 한다.
팔십의 세월을 보낸 후 기나긴 결혼 생활도 갑작스럽게 끝나버렸지만,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자유롭고 거침없다. 예상치 못한 방해물을 직면하고 돌파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어떤 모험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소수자와 상대적으로 몸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사회가 방치한 많은 시설물들이 장애물처럼 존재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투쟁 같아 보이지만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누구보다 유쾌하고 현명하게 헤쳐 나간다. 현재 이 순간에도 다가오는 하루를 개척하고, 도전하는 많은 여성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이끄는 곳으로, 그들 같은 어른과 함께라면 더 나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와 함께, 나이와 세대를 막론하고 계속 나아가며 발전하는 여성들을 응원하고 싶다.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