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은 죽었다
* 이 게시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2018)는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의 네 번째 장편영화이다. 그는 앞서 두 번째 장편영화인 <더 원더스>(2014)로 제6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2018년 <행복한 라짜로>로 제71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그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다시 한번 실력을 입증하였다.
<행복한 라짜로>는 많은 상징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 ‘라짜로’는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 중 ‘라자로의 부활’을 모티브로 한다.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는 자신의 작품에 비전문 배우를 자주 등장시키는데, 주인공 라짜로 역을 맡은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또한 그렇다. 그의 풋풋한 얼굴과 연기는 인물의 신성함을 증폭시킨다.
- 시간이 멈춘 마을, 인비올라타
작품은 라짜로의 부활을 기점으로 크게 1막과 2막으로 나뉜다. 1막은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 2막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인비올라타 마을은 오래전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곳에서는 불법 소작이 이뤄지며 소작농들은 끊임없이 일을 하고 매번 기근에 시달린다. 노인부터 아기까지 부대껴 살며 작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노래를 하며 청혼을 하는 남성과 이를 지켜보는 여성의 대비로 작품은 시작한다. 여성은 고민하다 이를 받아들이고, 남성 무리들은 집안으로 들어온다. 남성들은 배가 고프다며 집안의 빵을 먹고 유리병에 든 술을 나눠 먹는다. 여기서 소외된 사람들은 라짜로와 여성, 그리고 노인들이다. 작은 마을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형성하고 이어져 왔는지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는 인비올라타 속 가부장제는 더 지독하게 얽혀 있다. 여성은 청혼을 받으면 쉽게 거절할 수 없고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하며 살아간다.
마을과 도시를 잇는 끊어진 다리는 인비올라타의 상태를 대변한다. 중간이 무너져 내린 다리처럼,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마을처럼 그려진다. 후작부인은 소작농들을, 소작농들은 라짜로를 착취하며 비정상적인 굴레를 작동한다.
- 닭장 속에 갇히다
1막에서 닭장과 닭은 마을과 소작농들의 삶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오프닝에 나온 여성과 남성은 결혼을 빌미로 도시로 나가려 하지만 그들을 착취하는 니콜라에게 가로막힌다. 남성은 쉽게 순응하지만 여성은 크게 실망한다. 마을 탈출을 위해 결혼을 선택한 여성의 희망이 좌절된 것이다. 탈출한 닭들을 계속 닭장 속으로 집어넣고 감시하는 장면들은 꼭 소작농들을 못 나가게 막으려는 후작부인과 니콜라 같은 착취하는 자의 행위와 비슷하다.
- 탄크레디와 안토니아
작품 속 라짜로와의 관계 중 가장 돋보이는 건 안토니아와 탄크레디이다. 탄크레디는 라짜로와 우애를 나눈 인물이다. 라짜로는 탄크레디를 형제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준다. 달이 등장하는 시퀀스는 그들의 상태를 알려준다. 탄크레디가 라짜로에게 우정의 증표로 새총을 주었을 때는 만월이 뜬다. 라짜로가 열병에 걸렸을 때, 붉게 깜박거리는 불빛과 함께 반월이 뜬다. 그들의 달은 점점 야위어 간다.
2막에서 그들이 재회한 후 그들은 은쟁반을 달이라고 지칭하며 추억을 재연한다. 그러나 탄크레디는 너무 많이 변했다. 늙고 다친 그의 반려견처럼 그는 예전 같지 않다. 사람들을 속이던 자신의 엄마인 후작부인을 경멸했던 그는 장난처럼 사기를 치고 다닌다. 그가 라짜로에게 준 우정의 증표는 라짜로를 다시 죽음으로 내몬다.
안토니아는 유일하게 라짜로를 먼저 알아보고 불러 세운 인물이다. 안토니아의 비중은 1막에서 그리 크게 차지하지 않는다. 2막에서는 라짜로를 제외하고 안토니아의 비중이 제일 두드러진다. 왜 안토니아였을까. 2막에서 안토니아는 처음 라짜로를 마주쳤을 때 감탄하며 무릎을 꿇었다. 라짜로의 신성함에 그를 신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유일하게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 라짜로에게 성자 아카타의 그림을 보여주며 그의 믿음을 나타낸다. 아카타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한 성자이다. 그런 아카타의 이야기는 라짜로의 최후와 닮았다. 안토니아는 작품 전체를 아울러 전개되는 늑대 이야기의 서술자이기도 하다. 그는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토니아 또한 라짜로의 선한 얼굴을 이용하여 물건을 판다. 이후 죄책감을 느끼고 포기하지만 라짜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자연과 인간
도시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라짜로는 안토니아의 엄마에게 쓰레기를 태우라는 부름을 받고 집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다. 쓰레기를 태우는 그의 모습은 아이로니컬하다. 안토니아의 남편에게는 집 주변 풀들 중 식용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해 주며 그들에게 식재료를 제공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자연적 존재인 그가 오염된 세상과 인간들을 상대하고 돌봐주는 상황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 늑대와 성자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줄게 어떤 늑대의 이야기를. 늙고 병든 늑대가 있었어. 더는 사냥을 할 수 없었지 결국, 무리에서 쫓겨나. 그 늙은 늑대는 마을로 내려가서 가축을 훔쳤어. 배가 고팠으니까. 사람들은 어떻게든 놈을 죽이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어. 매일 밤 보초를 서고 덫이나 그물을 놓기도 했지만 놈의 행방은 묘연했지. 사람들은 그 늑대를 증오했어. 악랄하고 흉포하다고 여겼지. 하지만 그는 노쇠한 늑대일 뿐이었어. 짐승과 얘기하는 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 짐승들이 그의 말에 복종한다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찾아갔어. 성자는 늑대에게 휴전을 청하기로 사람들과 약속했지. 그는 늑대를 찾으러 길을 떠났어. 성자는 아주 오랫동안 걸었어. 걷고 또 걸었어. 그러다 겨울이 왔어. 성자는 지금 몹시 지쳐있어. 춥고 배고프지만 늑대는 보이지 않아. 그는 늑대 또한 배고프다는 걸 몰라. 한동안 늑대의 추적을 당했던 것도 결국 성자는 지쳐 눈 위에 쓰러져. 늑대가 그를 발견하지. 그에게 다가간 늑대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주춤거리지. 늑대는 킁킁거려 무슨 냄새일까?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어.
후작부인은 소작농들에게 마을 바깥에는 늑대가 득실대고, 강물은 깊어서 빠져 죽을 것이라고 속인다. 소작농들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무서워한다. 그들은 후작부인의 말에 세뇌된다. 구조되었을 때, 그들이 누가 봐도 얕은 강물을 건너라는 경찰의 말에 한동안 주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늑대 이야기 속 성자는 라짜로라는 것을 빠르게 알 수 있다. 늑대는 무엇일까. 1막에서 늑대를 경계하는 소작농들을 보면, 늑대는 니콜라와 후작 부인 같은 착취 계층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늑대는 절벽에서 떨어진 라짜로를 잡아먹지 않는다. 2막의 진행을 살펴보면, 늑대는 결국 ‘믿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소작농들을 실제로 두려워하게 만든 것은 후작부인이 아니라 그의 말을 ‘믿는 행위’였던 것이다.
세상 속에서 완벽한 믿음은 찾을 수 없다. 특히 라짜로가 부활 이후 도시에 당도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대 사기극의 피해자였던 이들은 부랑자가 되어 남들을 속이고 위협한다. 갇혀 살던 소작농들이 구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 사람들과 사회 속에서 라짜로가 맞이한 최후는 절망적이면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직감하게 한다.
착취 구조 속 가장 꼭대기에 있었던 후작부인의 모습은 2막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배제 속에서 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그들의 범죄와 상황을 보고 쉽게 비판할 수 있을까. 가짜와 사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맹목적인 믿음이 가능한 것일까. 영화가 끝나면, 라짜로의 눈물과 도시를 떠나는 늑대의 걸음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다.
기획·글/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