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줘
2006년 영화 <LOL>의 단역으로 데뷔한 배우 그레타 거윅은 다양한 범위를 넘나들며 활동 중이다. 감독으로서 <레이디 버드>(2018)와 <작은 아씨들>(2020)로 많은 노미네이트에 오르고 수상을 하며 그의 입지를 다졌다. 영화 <프란시스 하>(2012)에서는 각본 참여와 동시에 주인공 프란시스를 연기하였다. 그레타 거윅은 주인공 프란시스의 독보적인 에너지와 분위기를 잘 담아냈다.
<프란시스 하>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20대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이다. 고군분투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을 흑백으로 비춤으로써 그의 삶을 가로막는 현실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된다.
- 흑백 영화 속 ‘프란시스’라는 색체
주인공 프란시스는 무용수이다. 무대에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며 가끔 대역이나 작은 역할을 맡는다. 그는 머무를 집을 구하기 위해, 무대에 서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인다. 쉼 없는 그의 움직임은 흑백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때로는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그의 태도는 무채색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화사한 컬러 영화 같다는 느낌을 준다.
주변 인물들은 프란시스를 다소 철없게 생각한다. 프란시스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시하고 따를 뿐이다. 남들처럼 그러는 척 연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프란시스를 불편해하고 별종처럼 취급한다. 사람들의 눈길은 프란시스 본인을 의심하게 만들고 위축시킨다. 우리는 그들과 프란시스를 통해 감추고 타협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 서로의 미래
<프란시스 하>의 오프닝은 프란시스와 소피의 행복한 관계로 가득 차 있다. 레즈비언 커플 같다는 주변의 말을 들으며 둘만 있으면 남부러울 것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프란시스는 언제나 소피가 1순위였다. 같이 살자는 애인의 말도 거절하며 헤어질 만큼, 프란시스에게 소피는 평생의 룸메이트이자 친구 그 이상이었다. 소피와 밤마다 나누는 미래의 이야기에는 서로가 있었고 프란시스는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소피는 프란시스보다 자신의 안정된 미래를 쫓았다. 자신이 꿈꾸던 동네와 집에서 살기 위해 프란시스와 살던 집을 나온다. 소피는 프란시스와 달리 비루한 현실 앞에 좋아하는 것을 숨긴다. 자신의 애인에게 평소같이 장난을 치는 프란시스에게 화를 내고 둘은 크게 싸운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필요로 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고 안타깝게 다가온다.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건데,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땐 서로의 호감을 쉽게 눈치채잖아요. 하지만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고 웃고 있는 상황에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불순한 의도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런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작품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둘 사이에는 평정이 내려앉는다. 프란시스가 앞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둘은 서로를 응시한다. 그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지만 초반부의 무구한 행복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 같아 마음을 놓게 된다. 우리는 프란시스와 소피의 관계를 통해 사회의 시선 때문에 억누르고 제거했던 감정을 되새긴다. 그와 동시에 동성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한 번쯤 느껴봤을 경험을 상기시킨다.
- 달리기
많은 작품에서 ‘달리기’를 청춘의 상징물처럼 다룬다. <프란시스 하>에서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달리기는 존재한다. 프란시스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달린다. 초반부에서는 소피와 함께 달리면서 자유롭게 즐긴다. 소피와 떨어지고 난 뒤부터 프란시스가 달리는 목적은 기준을 따라잡기 위함으로 바뀐다.
보통의 이성애 관계를 위해 프란시스는 마음에 없는 레브에게 저녁 식사를 사겠다고 연락한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카드가 결제되지 않자 현금을 뽑기 위해 인출기를 찾아 방황한다. 달리고 넘어지고 달리기를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사회가 정해놓은 일반화에 들어서려고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브의 집으로 온 그는 레브에게 선을 긋고 둘의 관계는 쉽게 끝난다. 집을 구하고 있던 프란시스는 마침 방이 비는 레브와 그의 친구 벤지의 집에 새로운 룸메이트로 들어온다. 새로운 집 속에서 프란시스는 맞지 않는 퍼즐처럼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해방적이던 그의 달리기는 어느 순간 구속에 쫓기는 듯한 행동으로 바뀐다.
프란시스는 27살보다는 늙어 보이면서 행동은 더 어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거울을 의식하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았던 그가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정착
작품은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프란시스의 거처에 따라 흘러간다. 소피와 함께 살던 집에서 레브의 집으로, 고향에서 동료 레이첼의 집으로, 파리에서 기숙사로. 작품 결말에 이르러서 프란시스는 정착하게 된다. 무용수로서 무대에 서는 것 말고는 모든 걸 거절했던 그는 극단 사무실에서 일하며 안무 감독으로 공연을 만든다. 혼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던 그는 안정적인 거주지에서 머물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새로운 우편함에 ‘프란시스 할러웨이’라는 풀네임이 적힌 이름표를 끼워 넣으려다, 크기가 맞지 않자 이름표를 접어서 넣는다. ‘프란시스 하’라고 끊겨버린 이름표의 상태가 꿈과 현실의 중간에서 어느 정도 타협한 그의 모습과 닮았다. 덤덤한 프란시스의 행동은 한편으로 씁쓸하다.
<프란시스 하>는 주인공 프란시스를 통해 사회적 평균과 기준에 몸을 욱여넣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맞는 삶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깊은 질문을 던진다. 무채색 세상 속에서 프란시스가 멈추지 않고 자유롭게 달리기 바라며 말이다.
기획·글/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