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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 NEED YOUR VOICE Jun 15. 2020

책 『유럽 낙태 여행』

남성의 손에 쥐어진 여성의 권리


유럽 낙태 여행│ 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봄알람



  2019년 4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많은 이들의 투쟁과 목소리로 이뤄낸 결과이다. 그러나 헌법불합치가 결정이 된 지 1년이 훌쩍 넘은 지금, 낙태죄 개정 문제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이번 21대 국회가 앞으로 6개월간 법 개정에 실패한다면 낙태죄 관련 조항도 그대로 효력을 잃는다. 우리는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을 잘 알고 있다. 2018년에 출간된 봄알람 출판사의 『유럽 낙태 여행』은 유럽 각국의 낙태죄 실태를 다루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진행 중인 낙태죄 폐지 운동의 실상을 읽어가다 보면, 또 다른 현실과 문제들이 생동적으로 다가온다. 

  『유럽 낙태 여행』은 초입에 이렇게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낙태’는 임신 중단 혹은 임신 중지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지만, 좀 더 널리 쓰이는 낙태라는 단어로 여성의 재생산권을 이야기하는 책 속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낙태라는 언어에 덧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덜어내고 이것을 여성의 기본권으로 논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필자도 저자의 취지에 따라 임신 중지·중단 대신 ‘낙태’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을 밝힌다. 

  봄알람 출판사의 구성원인 4명의 저자(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는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루마니아, 폴란드를 탐방하며 여성운동가들을 만나는 ‘유럽 낙태 여행’을 떠난다. 여행 기행문 형태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그들의 만남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치 여행에 동참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여행의 현장감은 문장을 뚫고 나와 낙태죄 문제의 심각성을 피부로 전달한다.



유럽의 낙태 역사를 따라서 


  「1장 프랑스,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얻어진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에서는 여성들의 투쟁으로 낙태권을 얻어낸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한다. 불과 50여 년 전까지 피임을 불법화하는 피임죄가 있었던 프랑스의 끔찍한 가부장제에 대해 알아간다. 「2장 네덜란드, 파도 위 여성들의 나라」에서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시민 단체의 창시자이자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의 주인공 레베카 곰퍼츠를 찾아간다. 그를 통해 여성의 재생산권에 있어 ‘파라다이스’인 줄 알았던 네덜란드의 현실을 직면한다. 「3장 아일랜드, 수정헌법 8조 폐지!」에서는 태아에게 여성과 동등한 생명권을 부여해 낙태를 금하는 ‘수정헌법 제 8조’를 다룬다. 끔찍한 가톨릭 관념으로 탄생한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수용소를 이야기하며 국가가 여성에게 가했던 기학적인 폭력을 마주한다. 「4장 루마니아, 가장 끔찍한 국가주의 인구 정책의 역사를 넘어」에서는 프론트 협회의 페미니즘 운동가 카르멘 라두와의 만남을 통해 사회적 운동과 합의로 얻어낸 권리가 아닌 루마니아의 재생산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 하에 억압됐던 여성의 재생산권을 살펴본다. 「5장 폴란드, 검은 시위 당일, 거리는 처음으로 여성들의 것이었다」에서는 낙태가 합법이었다가 불법이 된 역사를 간직한 폴란드에서 퇴행과 싸워가는 여성들을 만난다. 2015년 ‘낙태 전면 금지화’ 법안에 반대하여 일어난 폴란드의 검은시위를 이끌었던 좌파 정당 ‘라젬’을 찾아가 그때의 기억을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6장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국가의 법이 유죄다」에서는 여행의 출발지였던 프랑스를 다시 방문해 낙태·피임 해방운동(MLAC)에서 직접 낙태 시술을 했던 의사, 마리 클로드를 만나 1970년대 당시 낙태권 투쟁 역사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들을 짚어본다. 



국가와 남성의 재산 


  “국민은 국가에 매우 중요해요. 국민이 느느냐 주느냐가 항상 중요한 문제죠. 자국민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여성에게 있어요. 만일 국가가 재생산 능력을 통제할 수 있다면 강력한 정치적 도구를 손에 넣는 셈이 되겠죠.”


-「2장 네덜란드, 파도 위 여성들의 나라」 91쪽


  임신이 여성의 쾌락에 따른 형벌이라는 관념은 사실 ‘섹스를 했으면 책임을 져라’ 같은 논리로 여전히 통용된다. 

  “그런데 씨를 뿌린 남자한테는 책임을 지라고 하지 않잖아요?” 

  레베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낙태를 할 때에는 무대에 여자만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면 그는 돌연 아빠의 아이가 된다. 어쩌면 이게 여서의 낙태를 그토록 다 함께 손가락질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국가와 남성의 재산인데 그것에 대한 선택을 여성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2장 네덜란드, 파도 위 여성들의 나라」 93쪽



  낙태 불법화를 강행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단순히 태아도 생명이다, 같은 문구와 함께 생명의 존엄성을 위함일까. 우리는 그들의 억압이 사유 없는 윤리 의식으로 포장된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동등한 책임이 있는 남성과 여성 중에서, 여성에게만 형을 부여하는 위선적인 시스템은 낙태의 불평등한 처벌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이러한 법을 집행하고 제정하는 구성원의 성비가 남성에게 심각하게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낙태에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 남성에게 법을 집행할 권한이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2장 네덜란드, 파도 위 여성들의 나라」에서 레베카 곰퍼츠는 국가와 남성의 민낯을 들춘다. 그의 말을 통해 낙태죄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여성의 재생산권의 통제는 정치적 도구와 직결되고, 출생된 아이는 남성과 국가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기득권의 전유물로 구속되는 여성의 불평등한 위치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의 문제점임을 되새긴다. 



기억할 역사기억할 분노


  막달레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이 시설은 “몸을 버린 여자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카톨릭 시설로, 18세기(1765년)부터 20세기(199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 여성들은 섹스를 했거나, 강간을 당했거나, 아기를 낳았거나, 아니면 그냥 너무 예쁘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곳에 수용된다.

  (중략)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세탁소를 거쳐간 여성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정된다. 1993년 이 시설 중 한 곳에서 시신 155구가 암매장된 묘지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막달레나 세탁소의 폐쇄성과 각종 문제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고 2013년에 국가 차원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운영해온 것은 카톨릭 세력이었지만 은밀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뿐만 아니라 정신적 학대를 받았던 생존자들을 위한 기금도 마련되었다. 


-「3장 아일랜드, 수정헌법 8조 폐지!」 123쪽



  저자들의 유럽 낙태 여행기가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국민총투표를 통해 아일랜드의 여성들은 수정헌법 8조 폐지를 이뤄냈다. 『유럽 낙태 여행』은 아일랜드 여성들의 참혹한 과거를 거쳐 승리에 이르는 현재까지의 증언을 보여준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시행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수용소는 여성혐오의 산물처럼 전해진다. 우리는 이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고 분노를 기억해야 한다. 






  『유럽 낙태 여행』 속에서 우리는 낙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상황들을 예견한다. 한국에서 낙태죄가 폐지된 지금, 언제든 다시 불법화로 전향될 수 있다는 것을 『유럽 낙태 여행』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또한 책 속에서 스쳐가는 다양한 여성 운동가들의 연대를 확인한다. 우리는 퇴보하지 않기 위해, 전 세계 여성들이 국가와 남성들의 아기 때문에 더 이상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해, 기득권층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기억하며, 다 같이 싸울 것을 다짐한다. 『유럽 낙태 여행』의 저자들과 더불어 지금까지 목소리 내어온, 또 앞으로 투쟁해갈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와 용기, 함께할 것을 전한다.




기획·글/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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