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해 가는 인간의 물성
우리의 미래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 두 가지를 규정하는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 것일까. 미래는 현재의 결과물이자,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거듭된 패턴 속에 인간의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기술의 발전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중 어떤 것을 불러올 것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때문에 미래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현재처럼 두 가지 모두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듯 아무것도 완벽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상상하고 구현해내는 것이 바로 SF의 세계다. SF는 과학 기술과 인문학이라는 두 담론을 결합한다. 공교롭게도 인간은 과학과 인문학을 인류의 숙명처럼 탐구하고 사유해왔다. 그런 부분에서 SF는 인간의 역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구축되는 역설을 띤다.
2019년 새롭게 마주한 작가 김초엽의 미래는 총체성의 시대 같다. 김초엽의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변부로 떠밀려지지 않는다. 여성, 이주민, 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들이 그의 세계에서 찬찬히 조명되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미래는 지나치게 빛나거나 혹은 지독하게 암울하지도 않다. 우리가 여태껏 느껴온 세계의 온도처럼 말이다. 궁극적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곳은 모든 생명체가 함께 공존하는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그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그 지점 깊숙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공간 개척의 시대
먼 미래, 시공간의 개척이 가능해진 시대에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탄생 행성이 아니다.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력과 시공간을 거스를 수 있게 하는 과학 기술은 그런 시대를 도래하게 만든다. 가능성을 열어본 순간 인간에게 지구는 “많이 비좁은”(151쪽) 공간으로 전락한다.
우주 개척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인물 안나는 인체 냉동 수면에 혁명을 가져다준 “딥프리징”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다. 그의 나이는 170세. 인간에게 더 넓은 은하로 나아갈 수 있는 기술을 선사하고 수 세대를 통과한 노인 안나는 운행 정지 100년이 넘은 정거장에서 제 3행성으로 가는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다. 소설은 그곳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연방국에서 한 남성을 파견하면서 시작된다.
“이동하는 우주선을 둘러싼 공간을 왜곡하는 워프 버블을 만들어서 빛보다 빠르게 다른 은하로 도달”(156쪽)하는 방법을 만들어낸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영역을 확장시킨다. 고작 달이나 화성 주변을 탐사해왔던 인간에게 워프 항법 기술은 우주 개척 시대의 본격적인 첫 장을 연다. 안나는 이 첫 장을 직면한 세대이자, 그 다음 장을 향해 가는 기술의 발전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다. 워프 항법 기술에 이어 “우주는 거대한 사과와 같고, 벌레들이 파먹어놓은 구멍들처럼 우주의 곳곳에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고차원의 웜홀들이 존재”(162쪽)한다는 이론을 기반으로 본격 발견된 “웜홀 항법”의 시대가 열린다. 이로 인해 빛보다 빠른 속도를 구현해야 하는 번거로운 워프 항법과 수많은 우주선들은 그 효용성을 잃는다. 웜홀 자체가 우주선과 통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인류는 웜홀 주변의 행성으로 이동한다. 안나의 가족이 있는 슬렌포니아를 비롯해 주변에 웜홀이 존재하지 않는 행성들 또한 필요성을 잃게 된 것이다. 불필요한 것은 신속하게 내치고 다음 발전을 탐색하는 연방국에게 분리된 가족의 슬픔은 배제된다.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안나는 가족을 저 먼 행성으로 떠나 보낸 채 이미 폐기된 우주 정거장에 머문다. 인류의 편의와 발전을 위해 사용되었던 과학 기술은 안나를 시대의 과도기에 홀로 남겨두고 빠르게 앞서나간다. “말없이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149쪽) 안나는 자신의 위치를 오롯이 체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냉동 수면을 반복하며 슬렌포니아로 향할 우주선을 기다린다. “한 번 동결했다가 깨어날 때마다 뇌세포가 우수수 죽어 버리는 기분”(179쪽)이 끔찍하더라도 말이다.
정거장의 주인
안나가 개발해낸 딥프라이징 기술은 냉동 수면 기술이다. 행성간의 이동을 위해 인간은 냉동 수면이 필요했다. 최대 몇 십 년을 요하는 이동시간을 위해 한정된 일생을 허비할 수 없었던 인류가 고안한 방법인 것이다. 안나가 연구 개발을 하던 당시 냉동 수면 기술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인체에 무해한 부동액을 개발하는”(158쪽)일이다.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해동과정에서의 세포 손상은 치명적이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은 냉동 수면에 인체를 채워 놓을 부동액 발견뿐이다. 안나는 그 발견에 성공한다. 그는 적극적으로 인류의 기술 발전에 기여했지만, 웜홀 항법의 발견으로 인해 냉동 수면이 불필요해진 인류에게 안나의 기술은 의료적 차원에 그친다. 인간 지성의 황금기를 일구어낸 안나는 “흔히 그렇듯 기술만 남고 학자의 이름은 잊”(155쪽)혀지기 시작하고, 그것은 인류와 기술의 발전에 불문하고 적용되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홀로 남겨진 안나를 위한 정거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인류의 발전을 위해 몰두하느라 슬렌포니아 행성이 ‘먼 우주’ 목록에 오른 것도 알지 못한 채 연구에 몰두한 그는 허무에 직면한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181쪽) 결국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182쪽)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류가 물질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의 확장이 곧 모든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논지는, 평생 연구에 몸을 바쳐온 안나의 역사를 무용하게 만든다.
그는 한순간에 전복된 삶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정말로 나를 영원히 떠난 게 맞는지, 그들이 떠난 이후로 100년이 넘게 흘렀다면 어째서 나는 아직도 동결과 각성을 반복할 수 있는지. 왜 매번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나는지. (중략)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럼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 왜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왜 나는 여전히 떠날 수 없는지....”(180쪽) 라는 그의 긴 상념은 편히 노후를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남성의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전달한다. 세상을 향한 안나의 자각은 거대한 과학 기술의 실체가 인간의 본질적인 물성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는 점을 꿰뚫는다.
발전을 위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던 안나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순적으로 시대를 역행해야 한다. 발전과 역행은 모두 무모하다. 확실한 성공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둔 안나는 기술적으로 간단한 역행을 거부하는 우주연방국과 세상의 규칙을 이해할 수 없다. 인류가 만들어낸 첨단 시대의 욕구에 맞게 “경제성”(170쪽)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같은 우연이 주어지지 않기에, 그로 인한 행복은 모두에게 균등 분배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닿을 수 없는 행성으로 바뀌어버린 슬렌포니아에 안나를 데려다줄 존재는 없다. 우주선도, 정거장도, 인간도 없다. 남은 것은 안나 자신뿐이다. 안나는 운영을 멈춘 지 100년이 넘은 정거장을 그의 것으로 만들고 수년 동안 다듬는다. 낡은 셔틀로 움직이는 것은 무모하고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지만,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안나에게 슬렌포니아와 정거장은 생경하지만 분명히 떠올릴 수 있는 빛이다.
파편 속으로
연방국 직원과 안나의 만남은 곧 현세대와 구세대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연방국 직원은 안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을 초월한 시대적 간극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안나는 지나온 역사의 산물이다. 거시적으로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있는 인간들은 각자 다른 미시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안나와 연방국 직원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시대의 이면을 되짚고 나면, 이 작품이 미래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투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말미,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수만년은 걸리는 거리”(183쪽)에 있는 슬렌포니아를 향해 안나는 “워프 버블조차 만들 수 없는 구식 셔틀”(같은 쪽)을 타고 떠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182쪽)라고 말하는 그의 움직임은 거침없다. 백 칠십 여 년의 세월을 버텨온 한 인간의 움직임이다. 시간, 기술, 거리, 등 그가 역행해야 할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약간의 오차만 발생하더라도 수많은 우주의 폐품과 파편에 부딪쳐 산산조각 날 수 있다. 그러나 동면과 각성을 통해 생과 죽음의 패턴을 거듭해온 안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파편을 헤치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가 도전해온 모든 것들의 마지막은 작은 셔틀 안에 응축되어 있다. 천재적인 과학자 안나는 자신이 슬렌포니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슬렌포니아로 떠나게 해주겠다던 연방국의 약속은,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172쪽)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남은 이들의 입을 막고 행동을 저지하려는 기득권의 속임수라는 것을, 안나는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통해 체감했을 것이다. 그가 낡은 기계를 몰아 돌파하고자 하는 것은 슬렌포니아 행성 그 이상이다. 수차례 동면과 각성을 반복하며 각인시킨 자신의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안나는 남자가 자신을 조준하는 것을, 그리고 폐품과 플라스마가 부딪혀 폭발하는 것”(187쪽)을 보며 빙긋 웃을 수 있다. 방대한 우주에 인간의 발자국을 확장시킬 필요도, 빛의 속도도 필요 없다. 그는 빛을 향해 가려는 인간의 물성 자체를 따른다.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182쪽)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188쪽) 에라도.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