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깔때기 끝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 물결이 일었던 시작은 언제일까. 물론 그전에도 여성인권에 대한 목소리는 계속 있었지만, 지금처럼 다수의 깨달음과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2015년 전후로 일어난 페미니즘 물결을 설명하기 위해 평론가이자 책의 저자인 손희정(이하 저자로 지칭)은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었다.”이야기하며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저자는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리부트 된 배경과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혐오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 문제로부터 복합적으로 발현된 한국의 페미니즘을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부 ‘젠더의 시선으로 본 동시대의 풍광’에서는 IMF 이후 한국 사회의 ‘감정의 인클로저’에 대해 분석한다. 「혐오의 시대」에서는 이 시대의 혐오의 문제가 어떻게 발현되고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지를 한국 정치계,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의 변화 등을 통해 조명한다. 「페미니즘 리부트」에서는 한국 영화의 양상을 통해 포스트 페미니즘을 바라보고 그 이후를 이야기한다. 「젠더전戰과 ‘퓨리오숙’들의 탄생」에서는 2010년대 중반에 이뤄진 대중문화 속 젠더 전과 ‘가모장’ 캐릭터를 탄생시킨 개그우먼 김숙 등을 통해 파퓰러 페미니즘의 탄생을 살펴본다. 「‘느낀다’라는 전쟁」에서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미투 운동 등을 바탕으로 ‘사이버 공유지’를 통해 구축된 연대 형태를 바라본다. 「어용 시민의 탄생」에서는 ‘진보 정치’라는 이름하에 이뤄지는 남성 연대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2부 ‘지금 여기를 조망하는 페미니즘 비평’에서는 개별적인 문화 텍스트를 다루는 비평들이 펼쳐진다. 영화학을 전공한 저자의 역량이 드러나는 파트라고 할 수 있다. 「천공穿孔의 상상력과 영화-구멍」에서는 영화 역사와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구멍’에 대해 다룬다. 「우리 시대 이방인의 두 얼굴」에서는 JTBC 방송사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동경과 혐오의 이중적 담론을 이야기한다. 「집, 정주와 변주의 공간」에서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주거공간이 어떻게 가부장제에 따라 재편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에서는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 이뤄진 대중 영화 속 문제점을 드러내고, ‘페미니즘 비평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골몰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허구적 향수에 사로잡힌 전통적 기득권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더 큰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은 점점 더 없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받는 시대에 남성들이 노출되어 있는 압박감의 무게도 물론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당대의 혐오가 특히 ‘여성 혐오’의 형태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신자유주의하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체제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자들을 배제하려고 더욱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옹호하는 반동적 집단 정서를 갖게” 되는 것이다.
- 「혐오의 시대」 33쪽
저자는 IMF를 지나면서 경제적·사회적·생물학적 생존주의가 유일한 존재 양식이 된 시대에 “왜곡된 인정 투쟁의 공간에서 살아남는 것”에 몰두하는 인간형, ‘스놉’에 집중한다. 앞서 ‘인정 투쟁’이 벌어지는 장은 “도덕적 존엄성이 훼손되고 파괴된 상태에서 무차별적인 과시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치적·경제적으로 주체가 될 수 없고, 사회 구성원으로도 인정받을 수 없고,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의지할만한 관계조차 찾아볼 수 없을 때,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힘을 가진 자’로부터 그것을 인정받기 위한 처절한 인정 투쟁에 몰두하게 된다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투쟁이 반동적 복고주의 형식과 내용으로 분명하게 가시화되는 이유에 대해 위에 분석을 도출한다.
그러던 와중에 2000년대가 되자, 스크린에서 여성 인물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사라진 여성들은 단 하나의 장르에 몰려들어갔다. 다름 아닌 공포영화였다. 이 시기의 공포영화는 하나같이 여성 괴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제 여성들은 귀신이나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하기 힘들어진다. 이들은 예외없이 모성이라는 올가미에 붙들려 이승을 배회하고 있었다.
- 「페미니즘 리부트」 57쪽
우리는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소위 말해 ‘알탕 영화’와 여성 캐릭터를 부속품이나 판타지 속에 가두는 작품들의 이유 없는 흥행을 목격해왔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고 나서 현재까지, 영화사 속 여성 캐릭터들이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치열하게 소비를 지양하고 행동한 결과로 이뤄낸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남성 서사와 ‘페미니즘을 파는’ 상업적인 영화를 계속해서 찾아볼 수 있지만, 전과는 다른 방향의 소비와 양상이 개척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과 이후의 한국 영화의 변천을 통해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해 서술한다. 위에 언급한 단락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당시에 여성의 표현이 ‘괴물이나 귀신’으로 밖에 출몰되지 않았으나, 90년대에는 다양한 ‘한국-여성-캐릭터’들을 선보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한국 영화의 흐름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실종 사건’에 다다른다. 저자는 이러한 ‘실종사건’이 1997년 IMF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화된 한국사회가 어떻게 젠더화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와 연관 지어 풀어낸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 페미니즘 비평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한 편의 영화가 대중의 상상력을 망치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게으름”이라 지적한다. “하나의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을 점검하고, 텍스트를 비판·분석하며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대중적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페미니스트 동료들의 비평을 통해 페미니즘 담론의 확장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다 밝히고, 관점의 전환 변이와 확장을 강조했다. 우리는 그의 사유를 통해 작품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이나 문제들을 비평하는 자세를 배우고 연대를 통한 귀납의 방식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은 언제나 ‘우리’가 놓여 있는 그 조건으로부터 등장했다.” 이야기하며 “현실과 분리된 채 공허하게 등장한 페미니즘이란 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당대의 페미니즘 시대의 한계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언급한다. 그가 집어낸 페미니즘의 배경과 파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범위를 마주하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깨고 부수고 꿈틀거리기를 멈춘 적 없고, 페미니즘은 한계를 갱신하는 상상력이자 실천의 에너지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목도를 통해 끝내 우리 스스로 범위를 확장하며 도약할 미래를 가능하게 만든다.
기획·글/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