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지 않을 오타루의 눈
지난 2019년 12월, “윤희에게”가 개봉했다. “윤희에게”는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을 시작으로 개봉 전부터 주연배우 김희애와 김소혜 캐스팅으로 이목을 끌었다. 또한 개봉 후에도 주연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와 작품성으로 12만 관객을 돌파하며 호평을 받았다.
“윤희에게”는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 없는 중년 여성 퀴어물이다. 가부장적 사회관과 동성애 혐오로 점철된 세계에서 중년 여성의 동성애는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배제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영화 “윤희에게”는 주제의식 자체로 의미가 있다.
- 살아남지 않으면 어떻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영화 초반부에 윤희의 모습을 보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결정된 가족부터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만들어진 가족까지, 어느 것도 윤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 영화는 윤희의 친가족과 전남편을 통해 가족공동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강압성을 드러낸다. 오타루로 향하기 전까지 윤희의 삶은 주변인들에 의해 제한 받아 왔다. 윤희는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예의주시 해야 할 존재로 남는다. 가족들은 윤희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부정하면서 성 정체성을 지울 것을 종용한다.
이혼을 한 뒤에도 가족의 굴레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새봄의 삼촌이자 윤희의 오빠인 용호는 새봄에게 윤희의 과거를 함구하고, 전남편 인호는 새로 만나는 애인이 있음에도 윤희의 집 앞에 자꾸 찾아온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그렇게 살 거 없잖아.”라는 무책임한 말을 내뱉으며 인호는 윤희를 붙잡는다. 무섭다는 윤희의 말을 묵시하고, 억지로 손에 봉투를 쥐어주는 전남편의 모습은 행위 자체로 폭력이다.
“윤희에게”에서 주목했던 것은 사회 속에서 중년 여성이자 동성애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냐는 딸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황망한 눈으로 기찻길을 걷는 윤희는,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 당한 여성이자 사회 속에 만연한 혐오 때문에 삶의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다. 오타루로 향하기 전까지 그는 세계 속에 안전히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것이 아닌 선택지 속으로 끊임없이 떠밀려야 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쥰의 삶 속에서도 드러난다. 쥰은 윤희와는 달리 결혼을 하지 않은 전문직 여성으로 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윤희와 상반된 삶을 살아왔을 것 같지만, 쥰은 한국 남성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사촌동생의 말에 피로함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윤희를 떠올린다. 도망치듯 사촌동생의 차에서 내린 쥰은 혼자 눈길을 걷는다. 전혀 다른 삶을 선택했음에도 비슷한 상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동시대 여성의 모습에서 앞서 윤희에게 보았던 허무가 느껴진다.
공교롭게도 윤희와 쥰은 가족의 해체를 겪은 후에야 서로를 마주한다. 쥰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의 죽음 후에 다시 윤희가 등장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윤희 또한 마찬가지다. 이혼 후 서울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딸 새봄과 함께 윤희는 쥰을 떠올리며 오타루로 향한다.
- 윤희와 새봄, 쥰과 마사코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에게 도착한 쥰의 편지를 읽는다. 새봄은 편지 속에서 자신이 몰랐던 엄마의 삶을 들여다본다. 미성년자와 성인의 경계에 놓인 새봄은 때로는 과감하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윤희를 이끈다. 새봄은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주변인으로서 서사를 만들어낸다. 삼촌과 아빠를 찾아가 윤희의 외로운 삶을 드러내고, 직접 쥰과 마사코를 찾아가 윤희의 존재를 알린다. 이렇게 “새봄”이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윤희의 딸이라는 역할에 멈추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연대하는 동반자로 확장된다.
쥰과 마사코 고모 역시 비슷한 연대를 그린다. SF소설을 즐겨 읽는 쥰의 고모 마사코는 쥰의 감정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인물이다. 마사코는 써놓고 부치지 못한 쥰의 편지를 윤희에게 보내며 과거에 온전히 마주할 수 없었던 둘의 감정을 전달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쥰과 윤희를 이어주는 마사코 고모는 캐릭터가 맡은 역할과 SF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설정까지 더해져 환상적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윤희에게”속 네 여성은 모두 연대하고 있다. 외롭고 허무한 삶 속에서 서로를 이어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 오타루에서
설경을 자랑하는 “오타루”는 서사 배경 이상으로 그려진다. 오타루는 윤희가 정체성을 다시 직면하기 위해 향하는 곳이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마주하는 장소다.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한국에서 윤희는 땅을 바라보고 걷고, 담배 한 개비조차 떳떳하게 피우지 못한다. 하지만 오타루로 공간이 이동하면서 윤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혼자 바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쥰의 집 주변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윤희는 새봄 앞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태운다. 그 모습을 찍으면서 새봄은 엄마를 닮았다는 삼촌의 말을 떠올리며 웃는다. 오타루에 오기 전 건조하고 어긋난 대화를 나누던 것과는 상당히 상반된 모습이다. 전형적인 가족의 구조에서부터 벗어나 오타루에 도착했을 때 모녀는 비로소 안정적이고, 평온하다.
- 그들은 지금
저예산 독립영화이자 다양성영화인 “윤희에게”는 다소 획일화된 서사와 압도적인 스크린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상업영화와는 대비되는 배급 구조를 갖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영화들은 대형 제작사와 배급사 틈에서 상영관을 확보하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차원이 다른 노력이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진 이 영화는 주제 자체로 대중성을 갖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희에게”는 독립영화로서는 쉽지 않은 숫자인 12만 관객을 돌파하며 이들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했다. 앞으로 이러한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었으면 한다.
“나도 네 꿈을 꿔.”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김희애의 목소리를 통해 깊은 울림을 주었다. 배우 김희애와 더불어 배우 김소혜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주연배우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글을 마치며 각자의 삶을 지속하는 윤희와 쥰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겨울 오타루에 내린 눈이 영원히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순간 현실 세계에서도 그들의 삶이 안전하고, 온전히 진행되기를.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