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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 NEED YOUR VOICE Mar 11. 2020

영화 <리코더시험>

잘못된 사랑의 습득





  <리코더 시험>은 김보라 감독의 <벌새>의 밑바탕이 되는 단편영화이다. 작품의 배경은 1988년. 주인공은 가부장적 가정 속, 삼 남매 중 막내이며 여자아이인 은희이다. 은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폭력적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어진다. <리코더 시험>은 시절에 대한 집요한 감정의 결과물이며 시대 공유물이다.




-  폭력적인 사회



  은희는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놓고 온 리코더를 가져다 달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반 아이들이 열심히 리코더를 불고 있을 때 은희는 혼자 손을 들고 벌을 받는다. 그렇게 고립되고 반 아이들과 구분된다. 아마도 그에게 첫 사회였을 학교에서 말이다.

  엄마는 은희에게 아빠의 외도를 확인하라고 한다. 아빠는 다른 이와 통화를 하고 있다.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은희는 방문 너머로 통화 내용을 엿들었지만 엄마에게는 거짓말한다. 엄마는 오빠의 밥상을 차려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아빠를 향한 은희의 사랑은 일방적이다. 받지를 못한다.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사랑해.”라고 말한다. 한 번은 신발 끈을 묶어 주는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한다. 어색한 정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아빠가 은희의 손에 닿을 수 있을 때를 오랜 시간 기다린 것이었을까.

  오빠는 은희를 자주 때린다.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은희를 보호해 주는 것은 나무 문에 달린 불안한 문고리뿐이다. 그마저도 은희는 공포심에 질려 열 수밖에 없다. 엄마와 아빠, 삼 남매 중 첫 째인 언니도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은희를 책임지지 않는다. 은희는 방안 옷장에 자신을 가두고 지킨다. 은희가 자라나 옷장 속에 숨을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은희는 고작 9살이다.




- 배우는 사랑


  한나는 은희의 유일한 친구이다. 한나의 집안은 은희와 다르게 유복하지만 그 점이 질투로 작용되지는 않는다. 한나의 집에 놀러 간 은희는 한나의 엄마에게 “예쁘게 생겼네.”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는다. 그리고 이게 사랑인가 생각한다. 무심코 던져진 어른의 칭찬을 사랑으로 습득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은희는 만화 잡지 속 여성 캐릭터가 그려진 페이지를 뜯어 방 한편에 붙인다. 마치 명화들로 잘 꾸며져 있던 한나의 방처럼.

 


  며칠 후 은희는 엄마에게 자신이 예쁜지 묻는다. 코는 예쁜지, 눈은 예쁜지, 귀는 예쁜지 묻는다. 한나의 엄마가 그랬던 것을 떠올리며, 미숙한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물음을 던지는 은희의 눈빛은 조마조마하다. 엄마는 은희의 그런 마음을 깨닫고 그를 안아준다. 영화 속 포옹 한 번이 참 벅차고 소중하다.





- 투투투


  은희는 리코더 시험을 잘 봐야 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리코더를 잘 불기 위해선 ‘후후후’ 말고 ‘투투투’ 불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강조한다. 하지만 은희의 환경은 ‘투투투’ 불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은희가 물려받은 오빠의 리코더는 낡았다. 은희는 아빠에게 용기를 내어 새 리코더를 사도 되냐고 물어본다. 아빠는 일단 바쁘니까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며 넘긴다. 은희는 아침 운동을 하면서 아빠가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기다린다. 아빠는 잊은 듯하다.



  리코더 연습을 하는 은희가 시끄럽다고 오빠는 윽박지른다. 급기야 은희를 때린다. 은희는 이러한 사실을 아빠에게 말하였지만 아빠는 우는 은희를 보며 “원숭이 같다.” 말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와 가정의 가난은 은희가 리코더를 힘 있게 ‘투투투’ 불 수 없게 만든다. 자꾸만 ‘후후후’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은희는 모두 알고 있다. 모든 불평등과 부조리를, 자신의 환경에 대한 한계를 안다. 그래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를 낸다. 모두가 잠든 새벽 온 힘을 다해 리코더를 분다. 아빠에게 저항하며 가족에게 저항하며 주어진 환경에 저항하며.


  리코더로 한 음 한 음 ‘투투투’ 소리를 내며 시험을 보는 은희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시험을 치르고 난 후, 선생님에게 “잘했어.”라는 통상적인 말을 들은 은희의 표정은 미묘하다. 홀가분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세상의 불합리와 불평등에 소리를 내준 은희가 고맙고, 그를 응원한다. 앞으로 그의 삶이 밝지만은 않을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









글.기획/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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