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메랄다의 삶은 과연 아름다웠을까
프랑스의 문학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노틀담의 꼽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프랑스에서 시작해 한국에 넘어오기까지 큰 사랑을 이어왔다. “달”, “Belle”, “대성당들의 시대” 등 전 넘버가 매니아층에게 각광 받으며 인기를 얻었다.
파리의 노틀담이 무대 위로
극의 스토리텔러 시인 그랭구와르는 넘버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성당들의 시대”는 격동의 혁명기를 맞고 있던 프랑스를 묘사하며(프랑스를 묘사하며) 네 인물의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알린다.
극의 배경인 15세기 프랑스는 혁명 직후 타락한 교회의 권력과 문화, 사회 다방면으로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었다. 혁명의 기운이 맴돌던 프랑스에서 빅토르 위고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중시하던 작가였다. 작가의 임무는 곧 불운한 사회구성원의 목소리를 복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빅토르 위고는 노틀담 대성당이라는 성역 안에 사는 흉측한 꼽추 콰지모도를 만들어낸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는 꼽추 콰지모도와 자유의 상징 에스메랄다, 그리고 잘못된 권력으로 이들을 휘두르는 신부 프롤로와 근위대장 페뷔스가 등장한다. 뮤지컬은 이들의 엇갈린 운명과 사랑을 무대 위에 그대로 재현했다.
이야기의 막이 오르기 전, 뮤지컬 무대는 삭막하다. 성벽을 연상시키는 투박한 벽과 묵직한 가고일 석상, 대형 종 모형이 무대 중간 등장하지만, 그 이상으로 화려한 연출을 선보이지 않는다.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거창한 무대 장치 없이 인간의 무용으로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형 무대 벽을 오르내리며 움직이는 아크로바틱 무용가들은 격동의 분위기를 표현해낸다.
콰지모도를 묶어 놓은 수레바퀴와 흉측한 가고일 석상은 콰지모도의 외형과 비슷한 운명처럼 보이지만, 그의 순수함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보여지기도 한다.
-Belle
프랑스 초연 직후 <노틀담 드 파리>의 넘버 “Belle”은 44주 동안 음악 차트 1위를 석권했다. <노틀담 드 파리>의 서사는 자유와 아름다움의 상징 에스메랄다에 대한 세 남자의 사랑으로 전개된다. 이들은 극의 중반부, 십자가 형태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각자가 느끼는 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 넘버의 제목이 바로 “Belle”이다. Belle은 프랑스어로 아름다움을 뜻한다.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각자의 시선에 취해 노래를 부르던 남성들의 엇갈린 사랑으로 인해, 에스메랄다는 죽음을 맞게 된다.
전체적인 서사를 들여다보면 에스메랄다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 그 이상을 상징한다. 에스메랄다는 부정한 욕망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페뷔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창녀이자 마녀”로 전락시켜 죽음으로 몰고 가는 프롤로 등 갖은 핍박에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지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페뷔스는 부정한 욕망을 위해 에스메랄다를 이용한다. 프롤로는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창녀이자 마녀”로 전락시켜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갖은 핍박에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는 지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이방인들의 삶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에스메랄다의 무해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극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에스메랄다의 춤과 얼굴을 바라보며 각자의 욕망에 휩싸인다. 이방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권력으로부터 저항하는 에스메랄다의 강렬한 자유의지는, 그를 가질 수 없었던 남성들의 헛된 욕망으로 인해 형장 속에 갇힌다.
공연이 끝나자 십자가 형상으로 누운 에스메랄다가 떠올랐다. 그들이 부르짖었던 에스메랄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에스메랄다의 삶은 과연 아름다웠을까?
에스메랄다는 극 내내 당시 남성들의 “뮤즈” 이미지로 소비된다. 뮤즈는 미술, 음악, 문학의 여신이다. 예술가나 문학가들 사이에서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일컬어지는 “뮤즈”는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남성들에게서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사 없이 오직 노래로만 극을 이어간다. 하지만 공연을 관람하다보면, 넘버 “에스메랄다”를 제외하고 다른 넘버들에서 에스메랄다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찾기 힘들다. 클로팽의 죽음을 기점으로 캐릭터가 변화하나 싶지만, 결국 그는 남성들의 뮤즈로서 혹은 아름다운 ‘대상’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에스메랄다는 성 안의 남성이자 권력계층에게 “창녀이자 마녀”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에스메랄다는 끊임없이 대상화된다. 화려한 겉모습은 그들의 시선을 즐겁게 했고, 자유를 위해 대항하는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권력층의 폭력적 욕망에 방아쇠로 기능한다.
콰지모도도 마찬가지이다. 콰지모도는 극중에서 누구보다 순수하고, 에스메랄다의 내면까지 사랑할 줄 아는 유일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메랄다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프롤로에 굴복하며 에스메랄다를 지켜내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위해 다시 춤을 춰 달라고 외친다.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이미 죽은 뒤다. 죽음을 맞이한 에스메랄다에게 콰지모도의 사랑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자유는 산 자들의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삶을 돌이키고 나니 “Belle”이 다르게 들렸다. 어떤 구절도 에스메랄다만을 위한 세레나데가 될 수 없다.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뮤지컬 <노틀담 드 파리>는 에스메랄다와 집시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콰지모도의 비참한 삶과 울부짖음으로 탄탄하게 진행된다.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흘러가는 넘버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넘버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는 관객의 감정선을 폭발시킨다. 에스메랄다의 죽음 자체는 비극적이지만 그를 위해 슬퍼하는 콰지모도의 모습이 있기에, 이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아름다운 모습인 것처럼 끝이 난다.
1998년 프랑스에서 첫 초연을 이룬 <노틀담 드 파리>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가장 프랑스다운’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존재 자체로 프랑스인들에게 큰 위안을 주는 성역 노틀담 성당을 배경으로 둔 것과 특유의 웅장한 무대세트, 그리고 시적인 가사들을 통해 그 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고전 문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의 서사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다른 창작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때는 에스메랄다의 존재에 다른 변화를 주어야 한다. 남성을 유혹한다는 이유로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마녀사냥 당했던 여성들의 역사를 되짚어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예술을 위해 여성을 뮤즈로 전락시키는 관행을 배격해야한다. 여성의 인격보다 예술이 위에 있을 순 없다. 모두가 헛된 아름다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란다.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