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들고 있는 사진기를 내려놓았다.
노랑의 도동서원이 주는 아름다운 비경을 사진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눈동자에 담아 글로 적었다.
가을의 도동서원은 노란 은행잎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다.
400년 이상의 세월을 간직한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전주 경기전과 성균관 명륜당의 은행나무 못지않게 그윽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특히 ‘김굉필 신도비각’ 옆에 곧게 선 다른 은행나무와 함께 도동서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나, 초여름을 바라보고 있는 5월의 중순 어딘가, 도동서원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지금의 도동서원은 기억 속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노란 풍경이 아닌 푸른 녹색의 산수가 나를 반겨주었다.
도동서원 전경의 모습, 푸른 녹음으로 둘러 쌓여 있다. 우리나라의 서원들은 모두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배산임수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축설계를 바탕으로 입구에는 누정을 세워 유식(遊息)과 소통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뒤로는 강당과 기숙사를 세워 강학(講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당을 지어 선현을 모심으로써 후학으로서의 마음을 다지는 제향의 공간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건축적인 요소들이 완벽하게 구현된 곳이 ‘도동서원’인 것이다.
도동서원은 건축적인 의미에서 완벽에 가까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도동서원은 건축물로서의 완벽함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알지 못하면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재미난 요소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도동서원의 수월루와 환주문을 지나니, 중정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정당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다른 서원과는 다르게 높고 웅대하였는데, 각자의 개성을 지닌 다양한 돌들로 조성되어 있었다. 김굉필 선생을 위해 전국에 있는 제자들이 자기 고향에 있는 돌을 가져와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또 기단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용머리와 다람쥐 조각이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문화해설사님 말씀으로는 낙동강의 범람으로부터 서원을 보호하고, 등용문과 같이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머리를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단을 오르내리는 계단 옆으로 다람쥐와 꽃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다람쥐는 몸소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출입규칙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태 방문해 본 다른 서원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볼 수 없었다. 도동서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하면서 사소한 볼거리였다.
도동서원을 홍수로부터 지켜주고 있는 용머리상 중정당 기둥에는 전국 서원 중 유일하게 흰색 종이를 둘러놓았는데, 이를 상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동방 5현 중 하나인 김굉필 선생을 모신 곳이라는 표시인데, 알면 알수록 도동서원은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은 공간이라 생각하였다.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이 끝나고, 중정당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 앞 내삼문 계단에는 한 송이의 꽃이 조각으로 피어있었다. 꽃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를 조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계단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 매화인 듯하다. 이른 봄의 추위를 버티고 피어나는 매화처럼, 돌계단에 핀 매화도 수백 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버텨왔다. 마당에서 긴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와 돌계단에 핀 매화가 도동서원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내삼문으로 향하는 계단 양옆으로 소맷돌을 세워놨는데, 태극문양과 만자(卍)가 조각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이유인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다음에 더 알아보기로 하고 황급히 내삼문을 나왔다.
5월의 중순인데 날씨는 이미 초여름인지라, 더위에 지쳐 더 이상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동입서출의 출입규칙을 지키며 시원한 중정당 대청에 올라섰다. 이미 많은 사람이 대청에 누워있거나 걸터앉아 있었는데, 나는 신발을 벗고 대청에 정좌하여 앉았다.
대청에 앉아 중정당 밖을 바라보았다. 환주문과 수월루가 있고 그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도동서원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게 있는데, 바로 중정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이다. 수월루는 도동서원이 지어지고 한참 뒤인 조선 후기에 세워진 누정이다. 이는 수월루가 세워지긴 전에는 강당인 중정당이 유식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른 서원들보다 높이 세워진 기단에는 아마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중정당 대청에서 바라본 전경 중정당 대청에 앉아있으니 바람이 솔솔 머리오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도동서원은 고요했다. 삐걱거리는 대청의 소리와 조잘대는 무명의 새소리가, 고용함이라는 오선지에 4분 음표를 그리는 듯했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자, 어슴푸레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좌한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았다.
마음에 휴식과 안정을 심어주는 곳, 계절의 추억을 지닌 그윽한 은행나무가 있는 곳, 돌계단에 핀 매화가 있는 이곳을 이제 사랑하게 되었다. 곧 초여름이 시작되면 배롱나무의 꽃이 도동서원을 분홍색으로 물들게 할 것이다.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는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
평화로운 이내 마음에 희미한 풍경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본 글은 2023 여행스케치 청연(시인보호구역)에
기고 및 수록되어있는 글을 조금 각색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