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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루씨 Jul 11. 2023

동창천과 청도 삼족대

내 삶에도 쇼크리더가 있었다면,

시간이 허락되어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없었다. 낚싯대만 들고 그저 강이 흐르는 곳으로, 여울과 절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벚꽃들이 만개하다 못해 흩날리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만의 낚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 뿐이었다.


조그마한 실개천을 따라가다 보면, 으레 큰 여울과 마주치게 된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이름 모를 조그마한 실개천을 따라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다른 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암벽 위의 정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경상북도 청도의 이름 모를 강에서 쏘가리를 만나기 위해 오래된 낚시 장비를 정비하였다. 가늘면서 긴 낚싯대에 작은 스피닝릴을 달고, 루어(가짜미끼)가 가득 들어있는 조끼를 입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바지장화를 힘겹게 당겨 입으며, 한동안 낚시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쏘가리 낚시는 낚싯줄이 생명이다. 강바닥의 바위틈 속에서 살고 있는 쏘가리와 만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바위에 쓸려도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줄에 줄을 이어서 동여맨다. 이 줄을 낚시꾼들은 목줄 혹은 쇼크리더라고 부른다.


나는 쇼크리더를 매듭지면서 잠시 생각했다. 내 삶에도 쇼크리더가 있었다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텐데, 발 앞에서 놓쳐버린 물고기처럼 삶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윤슬로 빛나는 여울 속으로 걸어갔다. 무릎 위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 낚싯대를 들어 세차게 휘둘렀다. 줄에 달린 가짜미끼가 포물선을 그리며 여울 위로 낙하하였다. 그리고 바로 앞 절벽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자와 고즈넉한 한옥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쏘가리가 있는 여울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내 앞에 족히 500년은 더 되어 보이는 문화재가 나타났다. 물 밖으로 나와 바지장화를 벗어던지고, 뛰듯이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효자 정려를 찾으러 다녔던 2년 전의 모습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어딘가에 이 누정에 대한 소개글이 있을 텐데, 문화재를 좋아한다는 놈이 낚시에 미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 것 같아 한탄이 절로 나왔다.


'청도 삼족대'


조선시대 김대유라는 선생이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누정이라고 적혀있는 안내문을 지나, 삼족대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유학과 관련된 문화재들은 필히 단청을 화려하지 않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삼족대는 목조건물 특유의 향이 느껴질 정도로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흙과 돌로 담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토담 너머 조용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 하니, 내가 신선이 된 듯하였다. 건물은 소소했지만, 풍경은 화려하니 시조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역시나 생각대로 대청에 있는 편액에는 삼족대를 배경으로 쓴 시판들이 즐비하였는데, 그 가운데 율곡 이이 선생의 글로 보이는 '삼족당서'가 있어서 좀 놀랐다. 우연히 들어온 곳이 이렇게 유명한 곳이었을 줄이야


삼족대를 나와 짧은 담장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곧 벼랑이었다. 벼랑 옆에 협문을 지나니 나의 눈길을 끌었던 절벽 위의 정자가 나왔다. 정자에서 흐르는 강물을 다시금 바라보았는데, 햇빛이 갈라져 여울 위로 빛의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저 여울과 햇빛의 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삼족대에 대한 경외감은 이내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이 다녀간 자리에 고작 낚시꾼 한 명이라니, 삼족대라는 과거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재의 초라한 모습이 어쩌면 작금의 내 모습과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삼족대에서 나오는데,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노인과 마주쳤다. 스쳐 지나가는 노인에게 이 앞에는 강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동창천'이란다. 쏘가리가 나오냐고 되물었는데, 옛날에는 좀 나오더니 이제 별 볼일 없어졌다고 하면서 지나갔다.


삼족대도 그러하리라. 더 이상 찾는 이가 없는 삼족대와 쏘가리가 사라진 동창천은 어쩌면 공동의 운명체로서의 인연을 같이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아쉬운 여운을 뒤로한 채, 다시 동창천 굳센 여울에 몸을 담그고 세차게 낚싯대를 휘둘렀지만, 한동안 아무런 입질을 느낄 수 없었다. 오늘은 허탕이었다. 이 좋은 곳도 이제 별 볼일이 없어진 게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강력한 입질이 나에게 찾아왔다. 여울 속에서 나를 반겨준 친구가 누군지는 모른다. 물 밖으로 나와 얼굴을 보여줄 때까지 이 녀석의 이름을 나는 알 수 없다.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아니 제법 큰 쏘가리이길 바랐을 뿐이었다.


녀석과의 힘 싸움이 거의 끝나갈 때쯤, 낚싯대의 무게가 갑자기 가벼워 짐을 느꼈다. 물고기를 놓친 것이다. 낚싯줄을 살펴보니 쇼크리더가 풀어져 있었다. 엉성하게 매듭진 쇼크리더가 득이 아닌 독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허탈함에 웃음만 흘러나왔다. 눈앞에 있는 삼족대와 몸 밖으로 흐르고 있는 동창천 그리고 쇼크리더 맺는 법을 잃어버린 낚시꾼은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다시 제대로 쇼크리더를 매듭하고 낚싯대를 휘둘렀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빈 허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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