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난치병 환자의 삶

by 온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척추를 뽑아버리고 싶다고
그렇게나 아팠고 그렇게나 힘들었다.


제대하고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어쩌면 깊은 고민의 결과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기 싫었지만 해야 했다.

걷고 싶지 않았지만 걸어야 했다.

그래서 아팠다.


재검을 받으러 가니 6급 면제 판정을 받았다.

이미 제대한 터라 면제된 것은 예비군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민방위를 참 빨리 시작했다.


종일 집안일을 하든 운동을 열심히 하든 그런 후에 찾아오는 전신근육통 같은 통증이 한 시도 빼놓지 않고 내 몸을 휘감았다. 그게 나에게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덜 아픈 상태였다.

심해지기 시작하면 허리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앉아있는 것은 고사하고 서 있거나 누워있을 수도 없었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화장실도 내 발로 못 가던 때도 있었다.

부축을 받으면서도 너무 아파서 화장실 갈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나아진 시점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 자랑스럽고 부지런한 한국인이 아니던가?

진통제는 진통제대로 파스는 파스대로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부했다.

허리가 저려오면 그 저림이 발끝까지 미칠 때까지 버텨냈다.

발끝이 저려올 때가 나에게 쉬는 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후에 들어보니 같은 병으로 고생한 많은 사람들은 처음 아픈 2-3년을 푹 잘 쉬고는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미련하게도 그 시기에 유학을 강행했고 통증은 15년을 넘게 나를 괴롭혔다.


이 고통에는 몇몇 기억들이 있다.

길을 걷다 통증이 찾아와 한참을 서있었던 기억

걷는 것이 어려워 지하철을 탈 때면 늘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을 통해 내려가고 올라오고 했는데 걷으로 표시가 잘 나지 않으니 신경이 쓰였던 기억

친구들와의 시간을 위해 나가다가 통증이 찾아와 몇 번이고 미안하다며 집으로 돌아온 기억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서 무엇 하나 함께 해보자고 할 수 없었던 기억

난 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지 않으면 안될거라 여겼던 기억


지금 생각해도 참 마음이 아프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참 잘 버텨온 것 같고 대견하다.

나 자신에게 고맙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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