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앞 복도에서 네 생각이 났어

by 수취인불멍


O에게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어.

압구정역, 2번출구를 걸어나와 5분정도 쭈욱 걸어나겨면

어쩌면 너도 알지도 모를 알만한 이름의 제작사 사무실이 있어.

회의실에 앉아 한참 회의를 하다 몇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쉬는 시간이 왔어.


잠시 화장실을 갔다오느라 복도를 지나는데, 나도 모르게 복도의 벽에 한 쪽 어깨를 기댔어.

그리고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봤어.


서울 오후 세 시.

세계 시계 앱을 넘기다 보니, 네가 있는 도시는 새벽 한 시.

아마 깊이 자고 있겠구나, 오늘 하루의 피로를 겨우 내려놓고 있을 시간이겠구나 싶어서,

“나 지금 힘들어”라는 메시지는 결국 보내지 못했어.


회사 복도라는 게 참 애매한 공간이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느낌.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사람이 아니고,

밖으로 나와 버리기 전까지는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도 아니야.


그 사이 어딘가에 서서, 나는 작가인 척,

어른인 척, 여유 있는 사람인 척 몇 번이나 표정을 고쳐 보다가

결국엔 그냥 휴대폰 화면에 네 이름을 띄워 놓고만 있었어.


사람들 앞에서는 늘 구조를 설명하고, 인물을 분석하고, 장면을 이야기해야 하잖아.

이 캐릭터는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이 대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논리적으로 말해야 해.

근데 복도에 혼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어.


근데 있지...

l 세상엔 꼭 모든게 다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엔 꼭 ‘반드시’라는 이유는 없을텐데,

사람들은 그 이유가 필요한가봐.

l 우리의 ‘반드시’는 뭘까?


나는 꼭 그게 필요할까 싶기도 해.

그냥 오늘은 뭐 먹었을지, 과제는 좀 줄었을지,

그 도시의 겨울은 어디까지 와 있을지 궁금하면 난 더 많은 이유가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어.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내가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작가가 아니라

그냥 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이런 날이면 네 생각부터 먼저 나.


하지만 지치거나 절망을 하진 않을게.

언제나 그렇듯 너에겐 밝고 행복한 나의 모습으로

l“나 오늘 좀 잘하고 올게.”라고 말할게.

현실은 그 정도로 멋있지 않아도,

준비한 말의 절반은 잊어버리고,

질문 하나에 대답을 더듬더라도.

l“나 오늘 좀 잘하고 올게.”라고 말할게.


너는 잘 자고 있겠지?”

그렇게 쓰고 나니까,

어쩐지 오늘 하루가 아주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더라.

이 편지를 언젠가 건네줄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이 복도의 공기를 아마 기억 못 할 거야.

그래도 이 문장은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회의실 앞 복도에서 잠깐,

나는 네 생각을 했다고.


서울 어느 회의실 앞 복도에서 C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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