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O에게
합정역에서 당산역을 지날 때면 지하철 창 밖엔 한강을 배경으로 63빌딩이 펼쳐져.
난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 봤다?
너처럼 서울 출신이 아닌 지방 출신들은 수학여행을 서울로 오곤 했었어.
그때 친구들은 다들 엄청 높다고 난리였지만,
왜 그랬을까
난 그때 저게 별로 높지 앞다고 생각했어.
아마도 그때 당시 내 자존감은 63빌딩 위를 날아다닐 만큼 거대했기 때문이겠지?
근데 오늘 오랜만에 다시 63빌딩을 보니 이상하더라
그때보다 내 키는 한 뼘보다 더 자랐고, 아는 것도 훨씬 더 많아졌는데
ㅣ63빌딩은 왜 이리도 높아보이는걸까?
너는 지금 어떤 교통수단을 타고 있니?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학교 셔틀을 탈까.
창 밖으로는 서울의 흘러가고, 창 안쪽에는 내 표정이 옅게 비치고,
그 사이 어딘가에 네가 있을 것 같은 기분.
창 밖에 한강와 63빌딩이 사라지자 시선은 다시 지하철 안으로 돌아왔어.
사람들이 각자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보는 그런 똑같은 세상.
결국 이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도 누군가에게 가는 길이거나,
누군가로부터 돌아가는 길이겠지.
나에게 그 사람이 너라는 사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굉장히 분명하게 느껴졌어.
어둡던 터널을 뚫고 올라오면, 갑자기 도시가 한꺼번에 펼쳐지잖아.
그 순간이 좋더라.
영화처럼 과장된 풍경도 아니고, 예쁜 엽서 같은 풍경도 아닌데,
그냥 “아,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마음이 들거든.
네 생각도 좀 그런 것 같아.
ㅣ터널 같은 하루를 지나가다가, 별 이유 없이 네가 떠오르는 순간들.
그래서 오늘 하루가 완전히 어두운 날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 같은 순간.
언젠가 네가 이 편지를 읽게 되면,
아마 이때 내가 타고 있던 열차 번호도, 노선도, 역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을 거야.
다만 그날의 나는 지하철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다가,
어쩐지 그 풍경이 네가 살아갈 도시와도 이어져 있다고 믿고 싶었어.
우리가 서로의 일상을 직접 보지 못하는 시간 동안에도,
각자의 창 밖에서 스치는 장면들을 떠올리며,
조금은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창에 비친 내 모습 뒤로 건물 불빛들이 줄줄이 흘러갈 때,
네가 있는 하늘도 지금쯤 서서히 밝아지고 있겠지 생각하니까,
나는 잠깐 너의 하루를 상상했고,
ㅣ그 상상 덕분에 내 하루도 조금은 덜 고단해졌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어.
어느 2호선 창가 자리에서 C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