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믿는다.” 가즈오 이시구로
O에게
오늘 서울은 하루 종일 흐렸어. 작업실에서 오전 내내 대본을 붙들고 있다가, 머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아서 카페로 자리를 옮겼어.
노트북 화면에는 아직도 인물들 대사가 반쯤만 적혀 있고,
그 아래 새 문서를 열어 놓고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아마 네가 있는 곳은 이제 막 해가 떠서,
사람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겠지.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내가 여기서 하루를 다 써버리고 네게 메시지를 보낼 때쯤이면,
너는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거잖아.
나는 이미 지쳤고, 너는 이제 힘을 내야 하는 시간.
같은 시간을 사는데도 늘 어긋난 리듬 속에서 사는 기분이야.
뻔히 알고 있는 이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되니, 카톡에 네 이름을 누르고 한참 동안 아무 것도 적지 못했어.
ㅣ어쩌면 내 피곤한 생각들이 네 하루의 첫 문장이 되고 싶진 않아서 그랬을거야.
예전에는 이런 걸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시차를 넘어 사랑하는 거, 다른 나라에서 같은 하늘을 본다고 말하는 거, 그런 말들. 근데 막상 이렇게 살아보니까, 같은 하늘을 본다는 말은 거의 농담에 가깝더라. 내가 창밖을 볼 때 너는 잠들어 있고, 네가 하늘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지하철 안에 있거나, 회의실에 갇혀 있거나. 서로의 하루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별로 없어.
그렇다 보니, 네게 쓰는 말들에 자꾸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아.
이왕 보내는 거면 좋은 기운만 보내고 싶고, 네 하루가 조금이라도 더 괜찮아지는 말만 고르고 싶고.
그래서 오히려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는 날이 있더라.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어. 채팅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결국엔 이렇게 편지를 쓰기 돼.
ㅣ나는 사실 네 하루가 어떤 표정으로 시작되는지 자세히 몰라.
강의가 있는 날인지, 과제가 쌓여 있는 날인지,
그 도시의 날씨가 네 기분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도 정확히 모르지.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기서 내 하루를 천천히 기록해 두는 것뿐이구나 싶다.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어떤 얼굴로 지내고 있었는지, 언젠가 네가 돌아와 이 편지를 한꺼번에 읽게 되면, 그때서야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너무 생각이 많았나?
나도 그런 것 같아서 정신차리고 대본이나 써야 했는데, 대본 속 인물들이 말하는 사랑과 내가 느끼는 사랑이 자꾸 부딪혀서였을까. 잘 안돼네.
화면 속 인물들은 몇 장면만 지나면 오해가 풀리고, 몇 줄의 대사로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데, 우리는 몇 시간씩 시차를 건너야 겨우 한 번씩 안부를 묻잖아. 그래서 차라리 이 편지들이 더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ㅣ공연이 끝나면 사라지는 대사 대신, 네게 닿을지 안 닿을지 모르는 문장들을 묵묵히 쌓아두는 일.
네가 이 편지를 읽는 날이 온다면, 아마 이 카페의 조명을 기억하진 못하겠지. 내가 마시던 커피 맛도, 오늘 고치던 대본의 장면도, 세세하게 떠올리진 못할 거야.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없는 동안에도, 너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네 생각을 가운데 두고 내 삶을 다시 쓰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단지 흐린 오후의 끝자락일 뿐인데, 이렇게 조용히 네 이름을 떠올리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니까, 이상하게 오늘이 완전히 나쁜 날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 앞으로도 이런 날들이 계속될 거야.
ㅣ네가 있는 아침과 내가 있는 저녁이 조금씩 어긋난 채로, 우리는 서로 보지 못한 시간을 건너가겠지.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느릿느릿한 우체통을 하나 만들어 두는 거야. 바로는 닿지 않더라도, 언젠가 네가 이 글들을 한꺼번에 열어볼 때, 이 시간들이 괜찮았다고 말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나는 대본보다 이 편지를 먼저 완성하고 집에 갈 생각이야.
너의 오늘이 어떤 장면으로 열리든, 그 장면 어딘가에 내가 살짝 떠오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좋은 하루였다고 믿어 보기로 했어.
조용한 카페 구석 자리에서 C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