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업 회장님의 자서전 대필작가 (3) 마지막화

“당신의 체리를 찾아요”

by 수취인불멍

나는 기사님의 말을 다시 돌이겼다.

지하철역 앞에서 나에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던 기사님이 내게 이런 말도 했었다.


“저는 와이프도 있고 애도 있어요.

그래서 우선 저는 이 일을 계속 해야 해요.

저는 그냥 운전기사라 작가님 쪽 세계를 잘 모르지만,

작가면 작가고, 비서면 비서지. 작가 겸 비서 같은 게 세상에 어딨어요?”


기사님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다.


나는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나조차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작가 겸 비서’.

맞다. 세상에 그런 역할이 애매하게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환상에 젖어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작가님은 아직 젊어요.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최대한 빨리 그만두세요.

그리고 그냥 작가해요. 작가해서 스스로 쟁취하세요.”


기사님의 말은 충고이자 경고였다.


약 2주 뒤,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회장님은 분개했고, 나를 소개해 준 분도 난처해했다.

자서전 작업을 위해 들었던 각종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비밀유지를 철저히 약속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온 날,

기사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집 근처에 도착해 내리려 하자, 기사님은 잠시만 앉아 있으라고 했다.

무엇을 하려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그냥 그러게 두고 싶었다.

기사님은 천천히 운전석에서 내려 뒷자석 문을 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내려 감사 인사를 건네자,

기사님은 말없이 허리를 깊이 숙여 90도로 인사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기사님은 내가 아는 최고의 프로였고,

그 다른 세상에서 내가 얻은 유일한 선물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나는 기사님 이야기를 먼저 한다.

정말 멋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때 경험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설명할 때면,

나는 꼭 ‘체리’ 이야기를 꺼낸다.


재밌게도, 내가 알고 있던 체리는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새빨갛고

맛없는 장식용 과일 같은 것이었다.

보기엔 예쁜데, 막상 먹어 보면 인공적인 단맛과 심심한 식감만 남는, 그런 체리.


그런데 어느 날, 회장님 집에서 배달 온 호텔 후식 접시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체리’를 먹어 보았다.


한 번 베어 물자,

달콤함과 새콤함이 동시에 터졌다.

입안 가득 퍼지는 향, 적당한 탄력, 과육에서 올라오는 묘한 쌉쌀함.


그제야 알게 됐다.

나는 30년 가까이 체리의 진짜 맛을 모른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대필 작가 시절을 비유할 때,

항상 체리를 예로 드는 걸 좋아한다.


분명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 느끼게 해줬던 시간이었다고.


‘참 별 희한한 일을 다 했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먹고 살기 위해 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자라났다.

‘아마도 내가 겪은 자극적인 실화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보고

내가 ‘부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르다. 그 일을 그만두긴 했지만, 내 꿈 역시 부자다.


전에는 ‘돈’이라는 걸 떠올리면

“필요한 것,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체리를 맛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맛보고 싶어졌다.


문제는, 이 욕심이 나를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욕심대로 살려면, 나는 내 한계를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


실제로 얼마 전에도 크게 앓았다.

평소에는 웬만한 일에는 스스로를 잘 다독이는 편인데,

그때는 한 달 가까이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작년 한 해 쓴 작품을 정리해 보다가,

내가 겨우 세 편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주제에 겨우 세 편?’


물론 좋은 퀄리티의 뮤지컬 대본을 한 편 뽑는 데에는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2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음악 작업과 개발 과정을 함께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죽어라 했다기엔, 이 핑계 저 핑계로 허비한 시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떠오른 이후로, 잘 수가 없었다.

자다가도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벌떡 일어나 대본을 쓰기도 했다.


일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맛을 다 맛보고 싶다.

이 욕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는 별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묻고 싶다.


그래서 당신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솔직히 나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고 싶다.

당신도 꼭 별이 되어야 하느냐고.


내가 별이 되고 싶다고 해서,

당신까지 반드시 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당신은 굳이 세상의 모든 맛을 다 맛볼 필요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질문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뛰기 전에, 당신의 목표는 어디냐는 것.


목표가 없다면, 굳이 뛰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굳이 체력을 낭비하나.


아니면 그냥,

호흡이 가빠지는 것만으로 안도감을 느끼고 싶은 건 아닐까.


목표라는 건 굳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

조금 찌질해도, 충분히 위대할 수 있다.


그 목표가 얼마나 화려한가보다 중요한 건,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내게 체리가 그랬던 것처럼.


부디, 당신도 당신만의 체리를 찾길 바란다.



[작법 노트] 사물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글쓰기


이 글에서 ‘체리’는 내가 경험한 새로운 세계, 욕망, 목표, 부자의 삶에 대한 감정이 뒤섞인 상징으로 쓰였다.

사물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면, 글이 훨씬 오래 남는다.


1. 감정부터 쓰지 말고, 사물부터 오래 바라보라

“나는 욕심이 많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라고 바로 말하면 글이 평면적이 된다. 대신 체리의 색, 식감, 향, 입안에 남는 여운을 먼저 적는다. “장식용 맛없는 체리”와 “호텔에서 처음 맛본 진짜 체리”의 차이를 충분히 보여주면, 그 사물 안에 이미 감정이 스며든다. 사물을 쓸 때는 최소 두 버전 이상을 비교해서 묘사해보자.


2. 사물에 얹힌 ‘사연’을 한 번만 강하게 연결하라

체리는 단지 맛있는 과일이 아니라, “30년 동안 알지 못했던 맛”이자 “돈이 열어준 새로운 세계”다. 이런 식으로 사물과 인생 경험을 한 번 강하게 묶어두면, 그다음부터는 체리라는 단어만 등장해도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사연을 떠올린다. 사물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얹으려 하지 말고, 핵심 사연을 하나만 선택해 깊게 파는 편이 좋다.


3. 마지막 문장을 사물로 끝내보라

“열심히 살아야 한다” 같은 추상적인 말 대신, “부디 당신의 체리를 찾길 바란다”로 끝낼 때,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삶의 체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된다. 사물은 좋은 마침표가 된다. 다음 글을 쓸 때, 결말 문장을 적기 어렵다면 오늘 글에서 가장 오래 머문 사물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보자. 그 사물로 문장을 닫으면, 감정의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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