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다는 말의 오만함에 대하여"
영화 <애수>(원제: Waterloo Bridge, 1940)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꼭 한 번 보길 추천한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로맨스 영화로 익히 알려진 작품이다.
물론 고전 영화인 만큼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 넓은 마음으로 감상할 필요는 있다.
특히 여주인공 ‘비비안 리’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보다
이 영화의 ‘마이러’('고아'라 성이 없다)가 비비안 리 연기의 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교인 남자 주인공 로이 크로닌이 하는 ‘패배주의자’라는 대사는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대단한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냥 실없는 농담처럼 툭 던지는 그 말이 묘하게 웃겼다.
로이와 마이러는 서로 사랑을 쌓아가지만,
전쟁 중이라는 상황과 신분 차이 때문에 사랑의 과정이 너무 쉽게만 이어지는 것을 불안해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 중간중간 로이는 마이러에게 이런 말을 자주 건넨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젊고 예쁜 아가씨가 패배주의자라니...”
사실 단순히 해석하자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
권위 있는 장교 출신 집안의 ‘로이’,
고아이자 발레리나인 ‘마이러’.
이들의 명백한 사회적 신분 차이가 이해관계의 격차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영국 귀족들만의 독특하고 우아한(?) 멸시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절대 “어디서 천민 출신이 감히 우리 집 아들을 넘봐!”라든지,
한국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시월드 같은 격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
스스로 칭하는 ‘신사의 나라’답게 말한다.
“이리 오게. 우리 사랑스러운 마이러.
난 자네 같은 댄서가 우리 집에 와서 너무나도 기쁘다네.
우리 영국의 명망 높은 영광의 크로닌 가문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빛날 걸세!”
그녀의 사랑스러움만을 드높이고,
고귀한 ‘발레리나’를 교묘하게 격이 낮은 ‘댄서’라 섞어 부르며,
동시에 가문의 위대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신사답게’ 상대를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잔인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 방식을 보고 있자면 참 씁쓸하면서도 흥미롭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이해’의 차이는
단순한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개념이라는 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도저히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단순히 정보 매체의 발달로 너무 많은 사람을 보게 된 탓인지,
아니면 인간 사회가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살다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잦아졌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점차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 근처로 서서히 다가왔다.
심지어 종종 그 일의 중심에 내가 서 있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끼곤 했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해’라는 것의 기준을 ‘나’로 삼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기준이 되는 ‘나’조차 지극히 미완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종교가 없고 신의 존재 또한 믿지 않지만, 세상에 종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결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타인의 삶을 분초 단위로 복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은 뛰어난 학문이지만,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이해’의 완성은 결국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가 해내야 한다.
미완성의 학문과 불완전한 타인의 시선을 빌려,
스스로의 개념을 완성해 내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굳이 남들을 이해시킬 필요가 뭐 있어”라거나 “난 원래 사람과 교류하지 않아도 행복해”
같은 헛소리로 도망치지 말자.
전자는 수많은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표현법을 피력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후자를 이야기하자면 사회정신의학에서 ‘원래’란 없다.
일시적인 고독의 즐거움과 사회적 자기방어기제를 자기 본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 부디 행복하시라.
1. ‘판단’ 대신 ‘목격’을 서술하라.
글을 쓸 때 “그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섣불리 판사가 되어 선고를 내리지 마라. 대신 목격자가 되어라. “그는 웃으며 댄서라고 불렀다”라고 적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가 먼저 흥분해서 판단해 버리면, 독자는 그 캐릭터를 이해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2. ‘이해 불가’를 ‘정보 부족’으로 바꿔라.
글에서 어떤 인물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이러가 왜 도망쳤는지, 로이가 왜 그런 농담을 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뒷배경’을 한 줄이라도 더 찾아 넣어라. 서사의 개연성은 거기서 나온다.
3. 나조차 이해 안 되는 ‘나’를 인정하라.
에세이를 쓸 때 가장 큰 함정은 나를 ‘완벽한 피해자’나 ‘현명한 관찰자’로 포장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라. “사실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라고.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문장이 독자에게는 가장 인간적인 위로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