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투쟁"
과거 공연을 마치고 나는 커뮤니티에서 온갖 욕을 다 들어야했다.
나는 그저 작품 하나를 올렸을 뿐인데,
‘미친 새끼’, ‘너보다 내가 더 잘 쓰겠다 XX’ 같은 이야기들.
내가 미친 새끼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작품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재미없는 작품을 쓴 작가로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주일간 우울감에 집 밖을 나오질 못했다.
적어도 나에겐 생명과 같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악플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런 일에 꽤 의연한 사람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내 눈으로 확인한 3~400여 개의 댓글은 내 멘탈을 산산조각 냈다.
그 몇 개의 댓글조차 내 정체성,
정확히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며
당장 어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일주일 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나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동시에 사람 하나를 그렇게까지 매장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거의 매해 많은 연예인을 잃는다.
그것도 우리의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진 문장들로 말이다.
우리는 늘 죄책감을 느끼지만,
정작 그 악플이 피해자에게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는 깊이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감히, 이미 고인이 된 한 연예인이 느꼈을 감정적 상태를
프로이트의 <자아동일성의 획득> 과정을 빌려 추측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타인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명확히 직시했으면 한다.
자,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세상의 모든 것은 크게 ‘생물’과 ‘무생물’로 나뉜다.
복잡한 과학적 구분법은 치우고, 쉽게 ‘살아 있냐 죽어 있냐’ 정도로 정의하자.
공교롭게도 우리는 모두 ‘생물’이다.
그렇기에 살아서 스스로 사고하고 욕망하며,
지금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봤을 때 생물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욕망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종종 정신이 ‘무생물’에 가까워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욕망이 사라지고, 존재의 이유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우울증’이라 부른다.
우울증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신은 이미 죽어버린 ‘무생물’ 상태가 되었는데, 육체는 여전히 밥을 먹고 숨을 쉬는 ‘생물’ 상태라는 점이다.
“내 정신은 날 ‘무생물(죽음)’로 인지하는데, 내 몸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삶)’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거대한 딜레마에 빠진다.
프로이트는 정신과 육체의 존재 상태에 괴리가 생길 때,
인간은 그 둘을 일치시키려는 강렬한 욕망,
즉 <자아동일성>을 획득하려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내가 생물이 될 것인가,
무생물이 될 것인가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생물이 되고자 결정한다면 정신적 우울감을 이겨내고 다시 욕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무생물이 되기로 결정한다면
안타깝게도 정신의 상태(죽음)에 맞춰 살아있는 육체를 파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가 떠나보낸 한 연예인의 인스타그램은 아직도 그대로 존재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녀가 정신적 무생물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생물’이 되고자 했던 처절한 시도들을 목격했다.
한 아이돌은 대학을 다닐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그곳에서만큼은 사람들이 자신을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학생으로,
즉 살아있는 생물로 대해줬기 때문이다.
라이브 방송에서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정신의 생물화’를 위해 내민 손길조차 조롱하고 모욕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러면 좀 사랑받을 수 있게 잘 행동하면 되지 않았냐”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대중 앞에 서는 사람은 어떤 악플에서도 강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강철 로봇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그녀 또한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태어난 존엄한 생명이었다.
악플은 그 생명을 강제로 무생물로 규정짓는 살인 행위다.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정신이 또렷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생물학적 활동’이다.
타인의 말에 죽지 않고, 쓰으로써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비난을 마주한다. 그것이 익명의 악플이든, 지인의 무심한 평가든 마찬가지다. 내 글과 멘탈이 ‘무생물’이 되지 않도록 지키는 3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1. 평가를 ‘분리수거’ 하라.
모든 댓글이 당신을 향한 조언은 아니다. 내 글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비판’과, 나라는 사람을 공격하는 ‘비난’을 철저히 구분해라. 비판은 수용하되, 인신공격이 섞인 비난은 읽는 즉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건 쓰레기를 안방에 모셔두는 것과 같다.
2. ‘생존 신고’를 위한 글쓰기를 하라.
우울감이 찾아오거나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거창한 작품을 쓰려 하지 마라. 대신 “오늘 나는 김밥을 먹었고 맛이 없었다”처럼 아주 사소한 나의 감각과 욕망을 적어라.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욕망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당신을 ‘생물’ 상태로 유지해 준다.
3. 독자를 ‘선별’ 하라.
“모두에게 사랑받는 글을 쓰겠다”는 목표는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하다. 내 글을 싫어할 권리도 그들에게 있다. 단, 나는 나를 좋아해 줄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쓰면 된다. 당신의 글을 기다리는 그 한 명을 위해 써라. 악플러 100명보다 팬 1명의 온기가 당신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