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입맞춤은 결코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다."프란츠 카프카
O에게
오늘은 조금 취한 밤이야.
회의를 마치고 사람들 틈에 섞여 술잔을 몇 번이나 비우다 보니,
집으로 바로 가기가 싫어졌어.
그래서 한 번 더 길을 돌아 내려와, 집 근처 무인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어.
테이블 위에는 이제 미지근해진 아메리카노가 있고,
창밖에는 골목이 보여.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미 멀어졌는데,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한 줄씩 다시 재생되는 기분이야.
이럴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져.
술 때문인지, 피곤 때문인지,
오늘 하루 동안 했던 말들이 전부 조금 과장되거나 빈약해 보일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오늘 쏟아낸 말들 사이에, 정작 내 마음은 몇 문장이나 섞여 있었을까.
사람들 앞에선 최대한 재밌는 사람이고 싶었어.
너 없이 혼자 있는 나는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싶어서,
분위기를 맞추고 웃기고, 적당히 농담에 몸을 맡겼지.
그러다 자리가 끝나고 혼자 길에 서면, 갑자기 말들이 조용해져.
그제야 남는 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이야.
그 말들이 흘러갈 구멍을 찾다 보면, 결국 이렇게 너에게 쓰는 편지 창이 열려.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지.
나는 매번 최고의 편지를 쓰고 싶어 한다고.
취한 밤에도, 지친 날에도, 대충 쓰고 넘기기가 싫다고.
이왕 너에게 닿을 문장이라면, 한 문장쯤은 네 손바닥 위에 오래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근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져.
아마 이 편지 역시, 너에게 닿기 전 먼저 나한테 도착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쓰는 문장들은 제일 먼저 내 눈에, 내 손끝에, 내 가슴 안에 꽂히잖아.
너에게 보이기 전에, 이미 나를 통과하고 나를 조금 바꿔놓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 편지는 꼭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겨우 붙들어두는 도구 같기도 해.
술기운이 조금 남아 있어서 솔직해진 마음,
혼자 집에 돌아가기 싫었던 발걸음,
사람들 앞에서 웃기 바빴던 내가 실제로는 얼마나 외로웠는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버릇까지.
이 모든 걸 한 번에 설명할 수 없으니까, 대신 몇 문장으로 묶어 너에게 건네보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도 해.
편지는 정말로 상대에게 닿는 걸까.
아니면 대부분의 편지는, 쓰는 사람에게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남는 걸까.
오늘 내가 적는 말들 가운데, 몇 문장은 너보다 내가 먼저 위로받을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생각했구나.”
“그래도 오늘 하루가 아무 의미 없는 날은 아니었구나.”
이런 걸 나부터 확인하게 해주는 문장들 말이야.
너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을까 궁금해.
누군가와 하루 종일 웃고 떠들다가 집에 돌아와서,
그 자리에서는 꺼내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밤.
이미 끝난 대화의 여백에, 혼자만의 대사를 덧붙이는 시간.
그럴 때, 너는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질까.
혹시 아주 잠깐이라도, 그 공백에 내 이름이 떠오르진 않을까.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보내지 않을 편지를 이렇게 쓴다는 게, 조금은 우스운 일이라는 걸.
언젠가 한 번에 건네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지만,
사실 그날이 정말 올지, 우리가 어떤 얼굴로 마주 앉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래도 이렇게 쓰게 돼.
보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편지를,
읽지 못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럼에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부분이 있어.
네가 이 편지를 언젠가 읽게 되든, 영영 읽지 못하게 되든,
이 밤에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어딘가에 남는다는 사실이야.
사라지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적힌 문장으로 남아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정리한 생각은, 말로 중얼거리고 지나친 생각보다 오래 버티니까.
오늘 카페에 들어올 때까지 나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척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어.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도 하고, 일 얘기도 그럭저럭 해내고,
“요즘 어때?”라는 질문에 대충 웃으며 “그럭저럭”이라고 답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
근데 지금 편지를 쓰면서 보면,
나는 여전히 네게 보고받고 싶은 사람에 더 가까운 것 같아.
오늘 어떤 말을 들었는지, 어떤 표정을 숨기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대답을 더듬었고, 어디에서 마음이 조금 상했는지.
이 모든 걸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대상이 여전히 너라는 게,
어쩐지 부끄럽고, 동시에 다행이야.
언젠가 이 편지까지 포함해서 모든 글을 한꺼번에 읽게 된다면,
아마 너는 오늘 내가 마셨던 술잔 개수도,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를 거야.
그저 “어떤 밤에, 혼자 카페에 와서 이런 마음으로 나에게 편지를 썼구나” 정도만 알겠지.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디테일을 다 알아야만 전해지는 게 아니니까.
어느 골목, 어느 시간, 어느 카페인지 모른다 해도,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사람이 너를 얼마나 간절히 떠올리고 있는지만 전해진다면,
그걸로 족해.
그래서 오늘은,
최고의 편지를 쓰겠다는 욕심보다는,
조금 덜 거짓말하는 편지를 쓰고 싶었어.
술이 깨고 나서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솔직한 편지.
내가 나를 미화하지도, 우리 관계를 과장하지도 않는 편지.
여기까지 쓰고 나니,
처음보다 머리가 조금 맑아졌어.
창밖 골목의 불빛도, 아까보다 덜 흐릿하게 보이고.
오늘 하루가 완전히 잘된 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편지를 남겨두고 집에 돌아간다면,
그래도 나쁘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고 기억하게 될 것 같아.
언젠가 네가 이 문장을 읽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아마 이 밤을 자세히 떠올리진 못하겠지.
다만, 어느 취한 밤의 끝자락에서
누구에게도 보내지 못한 마음을 너에게 건네 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먼저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만 쓸게.
남은 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너를 생각하며 집으로 걸어가 보려고 해.
집 근처에서 C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