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사랑

“하지만 사랑은 어려운 일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by 수취인불멍

O에게

오늘 아침에 잠결에 네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네가 보낸 사진을 제대로 못 봤어.

반쯤 감긴 눈으로 화면을 켰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잠 속으로 떨어져 버렸지.


그래서 지금은 사진 속 너의 모습이랑,

내 머릿속에서 부풀려진 너의 모습이 뒤섞여서 흐릿하게만 떠올라.

몇 번이고 다시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아 있더라.


이런 사소한 아쉬움들이 쌓여서,

멀리 있는 사람을 더 선명하게 그리워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오늘도 집 근처 카페야.

공연 보러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거야.

조금 전까지는 한 친구가 다녀갔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는데,

졸업 작품이 잘 통과해서 드디어 석사 학위를 받게 됐다고,

논문 대신 함께 붙들고 씨름했던 대본을 들고 인사를 온 거야.


별로 도와준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덕분이라며 선물을 건네더라.

포장을 열어 보니 향수였어.

올해 들어 두 번째로 받은 향수 선물이야.


첫 번째는 네가 떠나기 전에 내게 건네줬던 그 병이고,

두 번째는 오늘 친구가 내게 건넨 이 병이야.

스스로를 별로 향수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올해에만 두 번이나 이런 선물을 받으니 재밌어.


네가 처음 내게 향수를 건넸을 때, 사실 조금 어색했거든.

그 향을 맡을 때마다 네가 떠오를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 다시 향수 병을 받으니까,

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어.


아마 향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도 잘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모양 같은 거겠지.

같은 향을 맡으면, 그때의 공기와 조명, 말투와 표정까지 같이 떠오르잖아.

멀리 있는 사람과의 시간은 손으로 만질 수 없어서 더 빨리 사라질 것 같지만,

이렇게 향이나 문장으로 남겨 놓으면 이상할 정도로 오래 버티더라.


네가 내게 남겨준 향기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들이,

언젠가 우리가 기억을 되짚어 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오늘은 이런 편지를 써도 되나, 잠깐 고민하기도 했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굳이 꺼내 적는 건 아닐까 싶어서.

우리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하다고 말하는 너에게,

“괜찮을 거야”라고만 말해 주면 편할 텐데,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마음을 적어두는 게 오히려 더 무거운 부담이 되는 건 아닐까 싶은 거야.

그럼에도 결국은 솔직해지는 쪽을 선택했어.


나는 네 불안을 이용해서, 네 마음을 더 꽉 붙잡고 있는 사람이고 싶진 않거든.

일부러 연락을 늦게 하거나, 애매한 말로 걱정하게 만들어서,

나를 더 붙들게 만드는 방식의 사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는 이미 서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고,

그 거리만으로도 마음이 여러 번 흔들리는데, 거기에 더해서 일부러 불안을 얹어 놓고 싶진 않아.

그래서 오늘은 그냥,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는지 적어 두기로 했어.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하루 종일 대본을 고치고,

사람들과 회의를 하고, 때로는 웃긴 사람인 척 분위기를 맞추다가도,

문득 혼자 남은 순간에야 비로소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돼.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모르는 척 지나쳐도 되는 불안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시간을 그래도 함께 견뎌 보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이야.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가 다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더라.

올해도 금방 갔다, 눈 깜빡하니 또 한 살 먹었다, 그런 말들.

가끔은 정말 이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단순한 것뿐이야.

오늘의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

내일은 또 내일의 말로 사랑한다고 말할 방법을 찾아보는 일.

모든 날에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마음만은 한 번도 놓치고 싶지 않아.


이 편지를 언젠가 네가 읽게 되든, 아니면 결국 읽지 못한 채 어딘가에 남게 되든,

이 문장들이 적혀 있던 순간의 나는, 분명 너를 향해 있었을 거야.

향수 한 병처럼, 올해라는 시간의 냄새가 은근하게 밴 문장들로.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한 이유 같아.


그래서 오늘은,

너에게 어떤 약속을 하거나, 거창한 미래를 말해 주기보다,

그냥 이 문장 하나만 남기고 싶어.

오늘의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고,

그 말을 믿어보려고 이렇게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고 있다는 것.

커피 향이 거의 사라진 저녁,


어느 카페 창가에서 C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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