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

"사랑이란, 서로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바라보는 일이다.” R.M. 릴케

by 수취인불멍

O에게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였어.

새벽까지 붙들고 있던 대본은 그대로 있고,

할 일 목록에 줄줄이 적어 둔 일들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았어.

눈을 떴을 때부터 몸이 묵직해서,

잠깐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 했다가 그대로 오전을 통째로 날렸어.


점심쯤 겨우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대충 라면을 끓여 먹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하나 틀었어.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아, 오늘 하루를 통째로 흘려보냈구나” 싶더라.


그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너였어.

이상하지?

집 안에서만 대충 뒹굴거리다가 보낸 하루인데,

조금만 부지런했으면 너에게 자랑할 만한 일을 하나쯤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걸 못 했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미안해지더라.


우리는 자주 웃으면서 그런 말 하잖아.

“서로 멋진 사람이 되자.”

네가 거기서,

나는 여기서,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하고 싶다고.


그래서인지 가끔은

내가 덜 멋진 날에 너를 떠올리는 게 조심스러워.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대본 한 줄도 못 쓰고,

메일 답장도 미루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동선만 괜히 길어진 날.


근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어.

사람이 매일 멋질 수는 없잖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이 잘 나갈 때만 보는 게 아니라,


ㅣ아무것도 아닌 얼굴로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까지

떠올려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네가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상상을 했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네가 보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늘도 열심히 살았구나”라고 말해 줄까,

“좀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 줄까,

아니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 같이 누워 있을까.


우리는 늘,

열심히 살아낸 날을 서로에게 보고해야 할 것 같은 압박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

특히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14시간이라는 시차를 사이에 두고

“나 이렇게 살고 있어”라고 증명해야만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너에게 가장 고마웠던 순간들은

멋진 소식을 들고 찾아온 날보다,

솔직하게 “오늘 좀 망했다”고 털어놓을 수 있었던 날이었어.

그때 너는 해결책을 들이밀기보다,

먼저 내 기분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ㅣ서로의 하이라이트 장면만 이어 붙여서 보는 일이 아니라,

편집대 밑에 떨어져 있던 자투리 필름까지 한꺼번에 껴안아 보는 일일 거야.


너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나의 초라한 순간들까지 포함해서.


그래서 오늘은 이 하루를 그냥 지운 날로 남기고 싶지 않았어.

너에게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업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들려줄만한 성취도 없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기록해 두고 싶었어.


언젠가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아마 나는 오늘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대본을 못 쓰고,

알람을 몇 번이나 끄고,

침대와 소파를 번갈아 오가던 이 얼굴을.


그래도 그때의 너는 알 수 있을 거야.

그날 서울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ㅣ그래서 더 너를 떠올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걸.


그게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위로일지도 몰라.


오늘의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하루를 보냈지만,

그래도 그 하루 동안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그 정도면,

조금은 괜찮은 하루였다고 믿고 싶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 끝에서 C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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