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2년 동안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쏟아부은 작품이,
한 사람과의 갈등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2년의 시간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카페에서 나눈 두 시간 남짓한 대화면 충분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제 정말 작가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멀리했다.
버티고 노력하면 해결될 거라 믿어왔던 나날과 달리,
처음으로 약을 처방받아 먹어야 했다.
그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디 갔어, 버나뎃>의 버나뎃과 나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작품 속 그녀는 실제로 위대한 사람이고,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정 일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보이던 건축계에서 라이징 스타가 된다.
최연소 맥아더상 수상자, 시대의 아이콘.
세상은 그녀를 “천재 건축가”라는 타이틀로 불렀고,
그 타이틀에 걸맞게 살기 위해 그녀 역시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런데 3년을 들여 지은 집이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본다.
ㅣ자신의 건축물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건축가인 버나뎃에게 건축물의 붕괴는
자신의 영혼이 붕괴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어디 갔어, 버나뎃>은 장점과 단점이 아주 선명한 작품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일상과의 괴리감이 크지 않다.
“나는 저렇지 않지만, 누군가는 저럴 수도 있다”라는 시선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꽤 불편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심리 상담사다.
버나뎃이 힘겨운 상태에 놓였을 때 등장하는 이 상담사는
공감과 이해, 경청의 기본 자세조차 갖추지 않은 인물처럼 보인다.
상담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관객이 보더라도
ㅣ“저러니 버나뎃이 도망가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 지점에서, 막 현실에 이입하려 했던 관객 앞에
갑자기 “이건 영화다”라는 벽이 세워진다.
버나뎃의 세계는 실제가 아니라,
장치와 설정으로만 구성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감독은 최대한 수평적인 시선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캐릭터들은 비교적 단역에 가깝게 배치하고,
그 역할을 남녀 캐릭터에 골고루 나눠 줌으로써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악역으로 몰아가지 않으려 한다.
버나뎃은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건축가다.
어쩌면 이제는 “과거형”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ㅣ동시에 현실에서 보이는 그녀는 이웃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괴짜이며,
서툰 엄마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이상이 담긴 “건축가”라는 정체성과
ㅣ사회화를 거쳐야 하는 “부모”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에 있다.
버나뎃은 남편 엘지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다.
영화만 놓고 보면, 말을 하지 않는 버나뎃의 책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궁극적으로 대화의 단절을 이끈 사람은 버나뎃이 아니라 엘지에 가깝다.
버나뎃은 너무 천재이고,
엘지는 너무 “정상적인” 사람이다.
둘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다만 엘지가 이해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버나뎃의 정의와 다를 뿐이다.
만약 엘지가 자신의 모든 가치를 내려놓고,
온전히 버나뎃의 세계에만 맞추려 했다면
버나뎃이 조금은 회복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신, 엘지의 정신이 먼저 무너졌을 것이다.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해서 가까이서 바라볼 때,
그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가 버나뎃을 대하는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ㅣ그는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만 찾고 있을 뿐,
그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는 서툴다.
소통은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과정에 더 가깝다.
엘지는 그 사실을 끝까지 간과한다.
영화 속에서 “엄마는 환상에 빠져 있어”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그 말은 버나뎃이 감당해야 했던 현실과 환상 사이의 괴리를 드러낸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
그 둘 사이의 갈등은, 도망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상징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버나뎃은 남극으로 떠나 다시 건축 일을 시작한다.
엘지는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그녀를 따라간다.
ㅣ남극은 한 번도 엘지의 꿈이었던 적이 없다.
그 장면은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선택이 두 사람을 구원할지, 아니면 다른 방식의 파괴를 부를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버나뎃은 앞으로도 여전히 불안정할 것이다.
엘지는 여전히 버나뎃을 대하는 방법을 완벽히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유지하기에는 버나뎃은 너무 천재이고,
엘지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리고 그런 사람 곁에 서 있는 우리는,
어떻게 그 천재를 마주해야 할까.
다음 글에서는,
내가 실제로 만났던 한 천재의 이야기를 통해
“천재를 대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작법 노트] 내 경험과 작품을 겹쳐 읽는 글쓰기
내 경험을 먼저 ‘감정 단위’로 요약하라: “2년 동안 쓴 작품이 무너졌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감정이다. 좌절, 배신감, 허무함, 무력감. 감정을 먼저 한두 단어로 정리해 둔 뒤, 작품 속 인물의 감정과 어떤 지점에서 닿는지 찾아본다. 이렇게 하면 단순한 줄거리 비교가 아니라 “감정의 연결”이 가능해진다.
작품 줄거리를 ‘리뷰’가 아닌 ‘사건’으로 다뤄라: “버나뎃은 건축가다, 상을 받았다”는 정보 나열만으로는 글이 살지 않는다. 3년을 들여 지은 집이 한 번에 무너지는 장면, 남극으로 떠나는 선택, 상담사의 대사처럼 구체적인 사건을 짚어야 독자의 마음이 움직인다. 작품을 쓸 때도, 줄거리 전체를 요약하기보다 내 마음을 세게 흔든 사건 두세 개만 골라 깊게 적어보자.
비판을 쓸 때는 ‘무엇이 아쉬웠는지’까지 함께 써라: 심리 상담사 캐릭터가 불편했다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왜” 불편했는지를 풀어야 한다. 공감과 경청이 부재했고, 그 때문에 현실성이 깨졌다는 지점까지 적어야 비판이 설득력을 가진다. 글을 쓸 때 “이 부분이 별로였다”라고 느꼈다면, 한 번 더 물어보자. “이 장면이 조금만 어떻게 달라졌다면 더 좋았을까?” 그 답을 쓰는 순간, 비판은 분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