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est Castle Apr 10. 2024

당신이 느낀게 정답이니까

눈치보느라 느끼지도 못한 파란노을 앨범 좀 탑스터에 끼워넣지 마세요.


들어가기 앞서 필자는 파란노을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음을 밝힌다. 오히려 파란노을 음악 재미있게 들었다. 어떻게 재미있게 들었는지는 글 읽다보면 나온다.


제곧내


일단 제목이 곧 내용이고 지금부터 풀어놓을 내용은 왜 당신 귀에 좋은 음악이 명곡이자 명반인지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글이 될 것이다. 제목 후보가 여러번 갈아치워진 뒤 현재의 제목으로 결정했다. 더 공격적인 제목 후보가 꽤 많았지만 어차피 내 글 몇 명이나 본다고... 어그로 끌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럼 거두절미하고 시작해보겠다.


일단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에 "음악은 예술이다." 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있는가? 누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음악은 청각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이라는게 생각해보면 범주가 무지막지하게 넓다. 일단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상황을 보자.


"저 사람 일처리가 예술이네"

"예술적인 인테리어네요."

"얼굴이 예술이다."

"음식이 예술이다."


지금 위에 나열한 문장 외에도 생각해보면 예술이라는 단어가 보통 긍정적인 상황에 사용된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에 사용된다면 반어법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경우일 것이고. 그렇다면 긍/부정 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따라가보자.


일처리가 예술이다 = 일을 매우 잘한다 = 일을 해낸 결과가 이상적이다

인테리어가 예술이다 = 인테리어를 아주 잘 했다 = 인테리어가 이상적이다

얼굴이 예술이다 =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 = 얼굴의 생김새가 이상적이다

음식이 예술이다 = 음식이 매우 맛있다 = 음식이 아주 이상적으로 조리되었다


보통 무언가 빼어나게 잘 해냈을 때 "예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빼어나게 잘했다"의 의미는 사람들이 "이상"이라 여기는 상태에 극도로 근접했거나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런 수식어를 붙인다는 사실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예술적이다."라는 단어를 "이상적인 상태와 같거나 거의 구분할 수 없다."와 같은 단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제 의문이 생긴다. "예술"이 극도로 긍적적인 맥락을 갖는 다는 것 까지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럼 "예술"이라는 단어가 갖는 정보의 총체 중 일부, 음악 · 미술 · 공예 · 무용 따위의 집합인 "예술"도 "이상적인 상태"를 구현하는가?


마르셀 뒤샹, [샘] /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이것도 예술이라고 하는데 이게 이상적인가?"라는 반론이 당연히 제기 될 수 있다. 이걸 살펴보기 위해 "이상적인 상황"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거창한 것 없고 여러분도 다 아는 내용이다. 말로 구태의연하게 설명할 수 없더라도 경험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파트이니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상적인 상태는 무엇인가?


우선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그리고 질문을 하나 하겠다. 당신은 방금 상상한 상태를 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방금 상상한 그것은 정말로 이상적인 상태인가? 그렇다면 그 이상적인 상태에서 결여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음 문단에 제시 될 필자가 적은 "이상적인 삶의 상태"와 당신의 상상을 대조해보라. 완벽히 같은가?


일단 필자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삶은 서울 안쪽에 오피스텔 한 채를 자가로 지어놓고 월세를 받아먹으면서 사는 것이다. 지하에는 연습실이 있고, 옥상에는 정원이 있어야 하며, 필자는 옥상 바로 아래층을 통째로 사용할 것이다. 사는 도중에 재능있는 어린 예술가가 보이면 조각가, 미술가, 음악가, 영화 감독 등 장르를 막론하고 찾아가서 내가 월세 깎아줄테니까 내 집에서 살라고 제안할 것이다. 수락하면 시세의 50% 수준에서 집에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조건은 분기에 한 번 씩 필자가 주최하는 작품 발표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1층에는 만남의 장소가 있어서 그 안에서 건물에 사는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마음껏 교류하고 이따금 거기서 회식을 할 예정이다.


필자는 "이상적인 상태"에 속하는 원소의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을 했다. 혹시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 필자가 생각한 이상적인 삶과 같은가? 아마 99.9%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이 "결핍이 없는 상태" 라고 본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저 만족만을 느끼는 상태"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핍을 느끼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태"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큰 틀에서 비슷하더라도 디테일은 모두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치 필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은 큰 틀에서 건물주지만, 그걸 활용하는 디테일이 지금 상상한 당신과 살짝 다른 것과 같다.


물론 현재 이상적이라고 느낀 상황을 실현하더라도 그 현실을 당면했을 때 결핍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산소득에 대한 세금을 무지막지하게 떼어가서 건물주가 되었지만 내 예상치를 한창 밑도는 수입이 나온다든지... 그래서 건물주가 되고 나서도 뭔가 결핍을 느낀다든지... 그래서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상적인 상황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 상품은 감동(感動)을 소비한다.


예술작품의 감상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예술작품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 가겠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 상품은 예술작품과 "사실상 동의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시간마저 돈으로 치환할 수 있으니까. 은행에 돈을 넣으면 당신의 시간을 이자라는 이름으로 지급한다. 정기 예금이나 정기 적금은 일정시간 동안 당신의 자원을 못 쓰게 우리에게 묶어두는 대신 그 가치만큼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작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 음악가를 유지하기 위해 소비되는 금액(그게 자기가 벌어서 쓰는 것이든 기획사에서 지급하는 것이든), 각종 전시장(스트리밍 플랫폼, 공연장, 영상 플랫폼 등)을 유지하고 음원을 유치하는데 소비되는 자원까지 모두 돈으로 치환 가능하므로 현대 사회에서 문화상품과 예술작품은 사실상 동의어다.


감동이라는 단어를 이루는 한자를 풀어보면 결국 "느낌이 움직인다" 즉, 감정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우울의 감정이 될 수도, 기쁨의 감정이 될 수도, 흥분이 될 수도 있다. 우울한 음악을 통해 내 슬픔을 위로받고 싶을 수도 있고 그냥 한바탕 날뛰는 음악을 듣고 싶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모종의 감정을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 문화상품이다.


예술작품의 감상 과정


이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우리는 음악에 대해서 다루니까 음악을 감상하는 과정에 대입해 보자. 일단 음악가가 있을 것이다. 음악이 있어야 음악을 듣겠지? 그 다음에 그걸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이니까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 감상하는 과정이 되겠지?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콘서트라면 공연장이 될 것이고, 스트리밍을 한다면 음원 플랫폼이 있을 것이고 MV 감상이라면 유튜브가 주로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더라도 이 세개는 감상 과정에서 절대 빠질 수가 없다. 자 그럼 작품 감상 과정에서 세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


음악가는 일단 음악을 만든다. 기술을 활용해 모종의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청각요소를 적절히 배치한게 그 산물인 음악이다. 코드 진행, 편곡에 쓰인 악기, 엔지니어링 과정 등 모든 것이 "기술"의 영역에 들어간다.


매개체는 감상자와 음악가를 감상자 앞에 데려다놓는 역할을 한다. 매개체의 특성별로 음향 효과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공연장은 공연장 내부 구조, 스피커 배치, 장비의 상태 당일 아티스트의 컨디션 등의 요소가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 음원 플랫폼이라면 아티스트 뿐만 아니라 사운드 엔지니어의 취향 혹은 경험치 등이 들어갈 것이고, 영상 플랫폼을 통해 뮤직비디오와 감상한다면 시각적 요소가 추가로 반영된다.


감상자는 말 그대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감상자" 라는 요소는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도 소비하지 않는 예술작품은 감정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소비하는 것은 제작자 감상자가 일치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예술작품은 감상자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완성된다.


사람이 다 다른데?


시간 위에 청각요소를 일정 패턴으로 올려놓는 것이 음악을 만드는 기술이고 수많은 시간동안 인류는 그 기술을 쌓아서 정형화 해왔다. 연주 기법, 코드 진행, 리듬, 화성 등 수많은 요소가 그런 기술들이다. 그런데 아까 말했던 "이상적 상태"에 대입해서 이 부분을 고민해보자. 사람마다 "이상적"이라고 느끼는 상태가 다 다르다면 그 부분집합인 "이상적으로 슬픔의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소리의 상태"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가령 제목에 나온 파란노을을 예시로 들어보자. 필자는 파란노을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을 들으며 아마추어리즘 이딴건 모르겠고 그냥 슬펐다. 잔뜩 뭉개진 소리들, 투박한 테크닉이지만 처연하면서 조곤조곤하게 읇는 보컬이 슬펐다. 필자가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를 하며 겪은 무기력이 생각났으니까. 이력서를 아무리 넣어대도 돌아오지 않는 답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몫은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매일같이 카페로 출퇴근하고 주 3일 알바로 백만원 남짓한 돈을 손에 쥐어 스터디 카페 갈 돈을 충당하고, 피곤에 찌든 몸으로 랩탑을 켜서 어차피 떨어질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던 그 시절의 무기력함이 생각났다. 엉망진창으로 뭉개진 정돈되지 않은 소리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미친듯이 고민하던 그 시절의 감정과 비슷해서 슬펐다.


그런데 파란노을이 "나는 슬픔과 무기력을 표현하고 싶으니까 믹싱 엉망으로 하고 소리 다 깨부숴서 앨범 만들어야지!"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음악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같은 파란노을의 음악을 감상한 당신도 필자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아닐 것이라 단언한다. 같은 무기력을 느꼈더라도 무기력의 방식이 다를 것이다. 수험생이라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때문에 무기력을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을 수도 있고 어떤 직장인은 직장에서의 무기력을 음악을 들으며 떠올렸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과 필자 그리고 파란노을은 태어난 곳도, 다닌 학교도, 만나는 친구도 다 다르다. 부모님도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곡을 듣고 완벽히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음악은 결국 일정한 패턴으로 뭉쳐놓은 소리 덩어리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파란노을의 음악은 그냥 잔뜩 뭉개진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다.


막귀는 없다. 그냥 취향이다.


"이 좋은걸 못 느끼다니! 너는 막귀구나!" 라는 말을 "멜론 차트 좋은걸 모르다니 너 막귀구나?"로 그대로 뒤집어서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한국 궁중 음악인 대취타와 대중의 음악인 사물놀이는 각자 움직이는 감정이 달랐고, 호소하는 청자가 달랐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음악은 궁중음악이고 민속음악이고 둘 다 보존에 중점을 둔 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판소리와 같은 창법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종종 이날치 같은 사람이 오긴 하지만 지배적인 장르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소비자들은 판소리 하면 껌뻑 죽었다. 시장에서 버스킹하는거 구름처럼 몰려가서 듣고 돈 주고 그랬잖아. 서양식 성악의 보컬도 현대의 대중음악과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왜냐고? 서양의 성악은 신에게 바치는 음악에서 발전한 음악이니까. 그래서 깨끗한 소리가 나야했고, 발음법이라든지 소리를 내는 부분에서 일부 차이를 보인다. 당신이 15세기 유럽 교회에 떨어져서 너바나 음악 들려주면서 "이거 못 느끼니까 너 막귀임 ㅋ" 하면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못 느끼면 막귀임"의 종착지는 바흐다. 그 사람이 정리한 화성학 아직도 쓴다니까?


독자님 바흐 못 느낌? 막귀네 ㅋ

왜 바흐 안듣고 대중음악 들어요? 캐논코드 아직도 울궈먹는 장르가 재밌음? 막귀네 ㅋ


위의 발언을 보고 찔리는 부분이 있다면 친구들에게 반드시 사과하도록.


그저 시대가 원하는 소리가 있을 뿐이다


당장 백 년 뒤, 이 백 년 뒤에 어떤 음악, 어떤 기교가 좋은 소리로 선택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즐기는 것이다. 당신의 취향에 자신감을 가져라.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별로면 별로라고 말해라.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다.



그러니까 제발 들을 때 별로라고 생각한 파란노을 음악 눈치 보느라 탑스터에 끼워넣지마.





작가의 이전글 서리는 내려 앉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