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만나는 17년 지기
십오 년 만에 온 파리였다. 나는 파리에서의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매일 인스타그램에 하루 에피소드와 사진을 피드에 올렸다. 아이들을 재우고 그 작업을 하면 꼬박 2시간이 걸렸다. 눈이 빠질 것 같았지만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스타그램 앱을 켜면 그날 저녁 먹은 것 정도가 겨우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루 일들이 이렇게 빨리 휘발되는데 이 여행이 끝나고 남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휴대폰 갤러리의 사진을 기억의 밧줄 삼아 아침 점심 저녁의 느낌을 세세히 붙잡아 적었다. 그런 포스팅을 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 프랑스 친구에게 DM이 왔다.
[Hello Madame, Je suis a paris.(안녕! 마담, 나 지금 파리에 있어.)]
내가 2008년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그가 나의 인스타그램 팔로워였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진을 잘 올리지 않는 친구였고, DM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앗! 얘도 지금 파리라고? 우아 신기하다. 그런데 만나자는 건가?’ 이렇게까지 먼저 연락을 해줬으니 만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린 두 딸을 챙기며 파리를 여행하는 것이 너무 피곤해서 못 만날 것이 거의 확실했지만 말이다.
불문과를 졸업한 나는 파리에 친구들이 몇 살고 있다. 언감생심 가족들과 함께하는 이 여행에서 나는 지인을 만난다는 상상이나 계획을 하지 않았다. 친구가 잘 아는 현지의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맛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한국말로 친구와 함께 잠수하듯이 손을 잡고 풍덩 추억으로 빠지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환상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함께 있으면 수다는커녕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친구를 만나는 의미가 없어진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친구를 만나자니 그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빨리 지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이것은 한국에서도 그랬다. 주말에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핸드폰에 배터리가 떨어지듯 체력이 방전되는데 그게 오후 3시였다. 그러니 파리에서는 얼마나 에너지가 더 쓰였겠는가. 오랜만에 오는 파리가 너무 좋았지만 역시나 내 몸은 오후 3시가 되면 숙소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친구에게 답을 보내려고 Chat GPT를 켰다.
[오 정말이야? 나 이번 주 금요일까지 파리에 있을 거야. 오페라 근처에 숙소를 잡았어. 혹시 시간 되면 만나면 좋겠다. 가족들이랑 같이 여행 온 거라서, 저녁에 잠깐만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수요일 저녁 7시쯤이 가장 한가할 것 같은데, 그때 시간 괜찮아?]라는 내용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보냈다. '걔도 직장인으로 일하고 있을 텐데 시간이 갑자기 나겠어?'라는 생각으로 나는 예의 있게 답장을 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메시지를 주고받으니 17년 전 중국에서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무려 17년 전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그 해에 나는 중국 항주(杭州)의 저장대학교로 6개월간 어학연수를 떠났다. 적성에 맞지 않는 3년여의 회사생활을 때려치우고 떠난 도피성 중국행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현대미술 시장과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러 가는 거였다. 거창했다.) 반편성 테스트를 거쳐 배정된 반에는 12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주로 멕시코에서 국비장학금을 받아 온 학생들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서 여학생 두 명이었으며 프랑스인 남학생이 1명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친구는 자신을 ‘팔롱’이라고 소개했다. 프랑스를 중국어로는 ‘파구어法国’라고 하는데 ‘파구어法国’의 ‘파法’에 ‘롱龙’은 ‘용龍’의 중국식 발음이다. 이 둘을 합쳐 ‘팔롱法龙’이란다. ‘프랑스용’이라는 뜻이었다. 웃겼지만 너무나도 진지하게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 이후 나는 팔롱과 친해졌다. 내가 아무래도 불문과를 나왔으니 프랑스에 친근감을 느껴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와 친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팔롱이 나 말고 다른 한국인이었던 20대 초반의 여학생 M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 반에서 팔롱이랑 가장 친했다. 친했다기보다는 내가 챙겨줬던 것 같다. 당시 반 학생들의 평균 연령은 19살이었는데 나는 한국나이로 28살이었다. 만으로는 26살이었지만 19살 아이들의 눈에는 내가 너무 심하게 나이가 많아 보였 던지라 나를 ‘나이나이奶奶’(중국어로 할머니)라고 불렀다. 팔롱도 나보다 6살이 어렸으니 20살이었다. 프랑스인은 혼자이기에 외로워 보여서 나는 쉬는 시간에 팔롱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안부도 물어주었다. 팔롱은 늘씬하고 예쁜 M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M은 팔롱을 약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싫어했지 싶다) 그래서 팔롱이 M에게 수업 끝나고 배드민턴을 치자고 제안하면 M은 “언니(나)랑 같이 가면 갈게.”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결국 우리 셋은 자주 붙어 다니게 되었다. 묘한 그룹이었다.
그러다 결국 팔롱은 M에게 고백을 했고, M은 정확히 자신의 거절 의사를 표현했던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저녁 멕시코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팔롱과 같이 택시를 잡아 탔다. 우리는 택시 뒷 좌석에 앉았는데 팔롱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어렵게 입을 뗐다. 처음엔 중국어로 M과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뚝뚝 흐르던 눈물에서 펑펑 우는 모드로 바뀌더니 갑자기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나는 왜 프랑스어 공부를 소홀히 했던가.’ 그때만큼 나의 짧은 프랑스어 실력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다. 남의 연애사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내가 알아듣는 것인지 못 알아듣는 것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팔롱은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안 그래도 안 들리는데 울면서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니. 그러나 팔롱의 눈에는 뵈는 것이 없었다. 얼굴이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서 시뻘게져 있었으니까. 나는 계속 그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나의 프랑스어를 원망하며 억울함의 눈물을 흘렸다. ‘원통하다. 이걸 못 알아듣다니.’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웠던 젊은 날이다.
그날 이후로 셋이 같이 다녔던 때만큼 나는 팔롱과 자주 함께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학연수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팔롱은 나에게 M과의 일에 대해서 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조금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 같았다. 많은 위로를 받았나 보다. 하루는 나에게 용정차밭에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용정차밭? 거기는 내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용정차는 중국의 명차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녹차다. 항주는 용정차(龙井茶)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항주를 어학연수지로 선택할 때부터 그 차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거긴 우리 학교에서 가기엔 조금 멀었다. 7km 정도.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애매한 위치였다. 또 ‘차밭이라는 곳이 가봤자 차나무가 자라는 밭일 텐데 거길 가서 뭐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거길 자전거를 타고 팔롱을 따라간다면, 정말이지 충분히 갈 만한 동기부여가 되는 장소였다.
중국에서 외국인티를 팍팍 내는 방법은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다. 5월 초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 헬멧을 쓰듯 비장하게 선글라스를 쓴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각자의 자전거를 끌고 기숙사 앞에서 만났다. 용정차밭을 가는 길은 서호(西湖)의 가장자리를 따라 도는 코스였다. 팔롱은 지도를 보여주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나는 길도 모르는데 팔롱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쉬엄쉬엄 가면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는데 힘이 들었지만 곧 그 힘보다 더 큰 시원함을 맞았다. 1,000원어치 힘을 쓰고 5,000원어치 상쾌함을 얻어가는 기분이었다. 호수를 따라 커다란 버드나무 길을 지나고, 연보라색 꽃이 빼곡히 피어있는 꽃밭도 달렸다. 중간에 예쁜 연못이 보이면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가서 괜히 징검다리도 건너보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때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6개월 중국생활 중에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날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용정차밭에는 연두색 키 작은 차나무들이 얕은 언덕을 만들며 끝없이 펼쳐졌다. 정말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분명히 차밭은 야외였는데도 마치 잘 가꾸어진 온실에 있는 것처럼 아늑함이 느껴졌다. 자전거를 멀찍이 세워두고 차 밭으로 들어가 좁게 난 길을 걸었다. 차 잎이 바지에 닿으며 용정차의 특유의 달달한 향이 코끝에 도착했다. 옆 길로 걷다가 차를 직접 덖고 있는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아저씨는 커다란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철판 위에 찻잎을 올려두고 맨손으로 차 잎을 만지고 있었다. 팔롱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그에게 다가가 자기도 해봐도 되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흔쾌히 허락을 했는데 생각보다 엄청 뜨거운 차 잎에 깜짝 놀라 그는 뒤로 자빠질 뻔했다.
이런 기억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나는 1시간 정도라도, 아니면 30분이라도 팔롱을 만나고 오면 어떨까. 아니 만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또 언제 팔롱을 만나보겠는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남편에게 물었다. 혹시 숙소에서 저녁을 먹는 날, 잠깐 2시간 정도 외출했다 오면 어떻겠냐고. 남편은 흔쾌히 갔다 오라고 말했다. 아마 파리 여행 이후 독일에서 2주간의 연수가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너무 계산적인가?) 남편의 연수기간 동안 나는 아이들을 혼자 돌보아야 했다. (남편은 매일 오전 7시 30분에 나가서 저녁 7시 30분에 들어오는 스케줄이었다.) 사실 남편이 허락할 줄은 알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나의 저질 체력이었다. 만나기를 바라면서도 아쉽게 시간이 맞지 않기를 바랐다. 나도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저런 추억이 있는데도 망설여질 정도의 체력이라니. 팔롱에게서 답이 왔다. 자기가 시간을 맞추어보겠단다. 진짜 그를 만나는 것인가?
다음 주에 (하)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