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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어떻게 AI
챗봇 1등이 됐나

글로벌 기업들의 AI 도입의 명과 암

by 물병자리

"은행에 전화하지 마세요, 에리카에게 물어보세요"


2018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가 내놓은 광고 문구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리카가 누구인데?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에리카는 4천2백만 명의 고객과 20억 번의 대화를 나눈 금융업계 최고의 AI 스타가 되었다. 하루 200만 건의 상담을 처리하는 이 디지털 직원 이야기에는, 성공하는 AI의 조건이 모두 담겨 있다.


꽃게잡이, 돼지농장 등 노동현장을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글을 쓰는 르뽀작가 한승태 씨는 “콜센터가 내 작가 경력에 남긴 최고의 성취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묘비문구를 결정짓게 도와준 것이다. 이름 옆에 딱 이렇게만 적을 생각이다. 콜센터가 제일 힘들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을 또 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꽃게잡이 배도 한 번 더 탈 수 있다. 그런데 콜센터는 절대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매일 헤드셋을 통해 쏟아지는 모욕과 냉대를 견뎌내야 했던 경험이 그만큼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금융업에서 고객 서비스는 늘 골칫거리였다. 은행처럼 수억 명의 고객을 가진 은행이라면 하루에도 수백만 건의 문의가 들어온다. 문제는 이런 질문의 80%가 단순 반복 업무라는 점이다. 잔고 조회, 거래 내역 확인, 송금 등은 사실 복잡한 상담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고객은 이런 간단한 일을 위해 콜센터에 전화해서 10분씩 기다려야 했고, 은행은 수천 명의 직원을 콜센터에 배치해야 했다. 2016년쯤 B of A 경영진은 생각했다. "이 문제를 기술로 해결할 수 없을까?" 마침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자연어 처리(NLP) 기술도 실용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에리카의 탄생

다른 은행들이 IBM 왓슨 같은 외부 솔루션을 검토할 때, BofA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자체 개발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은행 업무는 너무 복잡하고 민감해서, 범용 AI로는 고객 만족도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2016년부터 2년간 사내 기술팀과 금융 도메인 전문가들이 협업해서 만든 것이 '에리카(Erica)'다. 이름의 유래는 'Electronic Recurring Interactive Customer Assistant'의 줄임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친근한 여성 이름으로 기억하도록 했다. 이것부터가 전략이었다.


에리카의 핵심 기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기본적인 은행 업무 처리. 잔고 조회, 송금, 거래 내역 확인 등을 음성이나 텍스트로 요청하면 즉시 처리해준다. 둘째, 개인 맞춤형 금융 조언. 고객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서 "이번 달 커피값이 지난달보다 30% 늘었어요"라든지, "구독 서비스 3개가 중복 결제되고 있어요" 같은 알림을 보내준다. 셋째, 24시간 언제나 이용 가능한 접근성.


2018년 6월 공식 출시했지만, B of A는 처음부터 에리카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았다. 대신 '통제된 AI' 접근법을 택했다. 에리카가 확실히 답할 수 있는 질문에만 대답하게 하고, 애매한 질문은 상담원에게 연결하도록 했다. 이는 금융업의 특성 때문이었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오류가 생기면 고객의 재산에 직접적인 피해가 갈 수 있다. 그래서 에리카는 은행 내부 데이터베이스와 동일한 로직으로만 답변하도록 설계되었다.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줄 아는 AI를 만든 것이다.


첫 시작은 조용했다. 사용법을 모르는 고객들이 많았고, AI 챗봇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BofA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모바일 앱 로그인할 때마다 에리카를 소개하고, 간단한 튜토리얼을 제공했다. 전환점은 출시 2개월 후였다. 사용자 10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출시 후 단계적 확산을 완료한 지 2개월 만에 10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확보했다는 BofA 발표는 업계를 놀라게 했다.


성공의 비결은 '가치 제공'이었다.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서, 고객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주에 ATM 수수료 15달러가 발생했는데, 무료 ATM 위치를 알려드릴까요?"라든지, "매달 나가는 구독료가 총 87달러인데, 사용하지 않는 서비스가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같은 선제적 알림이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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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는 사용자가 700만 명으로 늘었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비대면 서비스 수요가 폭증하면서 에리카 이용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사람들이 은행에 직접 가거나 전화하기 어려워지자, 에리카가 '비대면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숫자로 보는 에리카의 성과는 압도적이다. 2024년 4월 기준 20억 번의 고객 상호작용을 기록했으며, 1억 번에서 20억 번까지는 1억 번에서 10억 번보다 훨씬 빠르게 달성했다. 현재 하루 200만 건의 상호작용을 처리하고 있으며, 고객 문의의 98% 이상을 에리카가 직접 해결하고 있다.


인간과 AI의 협업

하지만 에리카의 성공이 콜센터 직원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할 분담이 더 명확해졌다. 에리카가 단순 반복 업무를 맡으면서, 직원들은 복잡한 상담과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2022년에는 'Mobile Servicing Chat by Erica'라는 기능을 추가했다. 에리카가 해결하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는 실시간으로 상담원과 연결해주는 시스템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AI와 사람의 장점을 모두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24시간 즉시 응답 서비스를 통해 고객 만족도와 충성도가 크게 향상되었고, 이는 은행 서비스 이용 증가로 이어졌다. 한 연구에 따르면 에리카를 포함한 AI 기술이 B of A의 연간 순이익을 19%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에리카의 성공에서 주목할 점은 기술 자체보다는 '고객 가치'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화려한 AI 기능을 자랑하는 대신, 고객이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에리카는 고객이 질문하기 전에 먼저 알림을 보낸다. "내일이 신용카드 결제일인데 잔고가 부족해요", "해외여행 가시나요? 해외 사용 신고하시겠어요?" 같은 식이다. 이런 선제적 서비스가 고객들에게 '내 돈을 관리해주는 비서'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B of A는 에리카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고객 피드백을 분석해서 자주 묻는 질문의 답변 품질을 높이고, 새로운 기능을 계속 추가했다. 분기당 1억 6천7백만 건의 상호작용이라는 막대한 사용량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활용해 AI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건 B of A의 '보수적' 접근 방식이다. 에리카는 확실하지 않은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이 질문은 전문 상담원에게 연결해드릴게요"라고 말할 줄 안다. 이는 다른 업계의 AI와 다른 점이다. 전자상거래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AI가 틀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금융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고객의 재산과 직결된다. BofA는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유용한 AI'를 만드는 대신 '제한적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AI'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에리카는 고객들의 신뢰를 얻었다. "AI가 틀릴까 봐 걱정"이라는 선입견 대신, "에리카가 알려주니까 맞을 거야"라는 믿음을 심어준 것이다.


에리카 성공의 또 다른 요인은 조직 문화 변화였다. B of A는 AI 도입을 단순한 기술 프로젝트가 아닌, 전사적 변화 관리 과제로 접근했다. 콜센터 직원들에게는 "여러분의 일자리가 없어진다"가 아니라 "더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단순 문의는 에리카가 처리하고, 직원들은 복잡한 금융 상담이나 고객 관계 관리에 집중하도록 역할을 재정립했다. 경영진의 지원도 결정적이었다. B of A는 연간 40억 달러 규모의 기술 투자 예산 중 상당 부분을 AI에 집중 투자했다. 단순히 비용 절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미래 경쟁력의 핵심으로 AI를 바라본 것이다.




2024년 현재 에리카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2024년 B of A의 디지털 채널 매출 비중이 55%까지 증가하면서, 에리카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단순한 질답을 넘어서, 개인 맞춤형 금융 설계까지 도와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은퇴 자금 목표 달성을 위해 매월 얼마를 저축해야 하는지", "현재 포트폴리오에서 리스크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복잡한 조언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핵심 교훈

B of A 에리카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세 가지다.

첫째, 도메인 특화가 답이다. 범용 AI 솔루션보다는 자사 산업과 고객에게 특화된 AI를 만드는 것이 성공 확률이 높다. B of A는 금융업의 복잡함과 민감함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AI를 자체 개발했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도, 결과적으로는 더 큰 성과를 얻었다.


둘째, 기술보다 가치가 우선이다. 에리카의 성공 비결은 화려한 AI 기술이 아니라, 고객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한 데 있다. 단순한 질문 응답을 넘어서 개인 금융 관리를 도와주고, 선제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면서 고객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개선했다.


셋째, 인간과 AI의 협업 설계가 핵심이다. AI가 모든 걸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잘하는 일과 사람이 잘하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협업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에리카는 단순 업무를 처리하고, 복잡한 상담은 전문 상담원에게 연결하는 매끄러운 협업 체계를 만들었다.


에리카는 단순한 챗봇이 아니다. 4천2백만 고객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금융 생활을 돕는 디지털 파트너다. 하루 200만 번의 대화를 나누면서도, 98% 이상의 문제를 정확히 해결해주는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었다.

B of A가 6년간 쌓아온 이 경험은, AI 도입을 고민하는 모든 기업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기술의 완성도보다는 고객의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성급한 확장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 성공하는 AI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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