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따로 산 시간이 같이 산 시간을 넘었어.”
아이가 잠든 늦은 밤 빨래를 개키던 내가 그에게 말한다.
“그래?”하며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별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지 오래되었다. 나는 요즘 들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지점과 지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가까운 지인 부부가 몇 개월간 서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진 뒤에 대화에 이르렀는데 두 사람의 결론이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은 다시 한번 잘 살아보기를, 다른 이는 이대로 부부 사이를 정리하기를 바란 것이다. 서로 기겁했고 난감해했고 싸웠고 불편해졌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남보다도 못하게 지내고 있다. 그걸 보니 걱정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고 같이 살아도 다른 마음을 품는데 우리는 떨어져 사니 짐작만으로 그의 마음 움직임을 알 수 없다. 나와 같겠거니 생각하다 막상 다르면 또다시 마음 둘을 맞추는데 에너지가 들 것이다.
“혼자 지내는 거 괜찮아?”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몰라서 조금 긴장하며 묻는다.
“이제 익숙해서 오히려 누가 있으면 불편해. 혼자가 편해. 나 집에서는 아무것도 안 입고 있어. 동물이야.” 그가 웃는다.
알몸으로 집안을 왔다 갔다 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따로 살길 잘했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구?”
그건 오 년 만에 처음 하는 질문이다. 전부터 가끔 물어보고 싶어도 못했던 그 말이 오늘은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온다. 그는 별로 놀라지 않고 대답한다.
“만나려고 하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누굴 만나면 낚시하는데 방해될 것 같아서.. 허허”
그는 요즘 낚시에 푹 빠졌다. 한 주에 두 번은 바닷가로 떠나고 한 달에 두서너번은 제주에 간다. 아예 제주에 거처를 마련할까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많이 솔직하고 약간 어이없는 대답에 나는 웃음이 났다. 고무된 그는 더더욱 솔직하게, 사실 나라는 사람은 여자가 별로 필요 없다고, 잠깐만 좋을 뿐 곧 귀찮아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건 알고 있는 바였다. 내가 한때는 그 여자였으니 말이다.
“오빠는 사람을 원래 좀 귀찮아해.”
그는 골똘해지는 것 같았지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람과의 관계란 시간이 지나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밀려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고 도리어 비워지는 것이었다.
“다행히 애는 그렇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한 예외가 아이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예외가 아닌 것에는 조금도 서운한 마음이 없다.
가끔 외롭다고, 우리는 이야기했다. 외로움에 대해서라면 이제는 다 앓고 일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따금 외롭다. 그런데 실은 우리가 같이 살던 때에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다시 같이 살게 된다면 외로움도 어쩌지 못하면서 서로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는 착각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지금처럼 서로 완전한 자유를 주면서 살 수는 없다. 일주일에 세 번씩 낚시 가는 일도 불가능하다. 알몸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밤새 책을 보고 늦잠을 자는 일요일도 불가능하다. 딴 집 조상의 제사에 당연하게 빠지는 일도 불가능하다. 너무 가깝게 보고 알고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간섭과 불만은 발생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의 사생활에 관여할 권리가 없고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그 질문에서는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괜찮은 것 같아’라는 조심스러운 대답을 서로에게 건넨다. 위로이자 다짐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이제 그 질문 너머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나는 말한다. 결혼보다 길어진 별거에 끝없이 정당성, 합리성, 옳고 그름을 따지며 후회와 미안함 같은 걸 거듭하지 말고,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고. 이렇게 별거하는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아야 더 많이 행복한가? 가족의 가장 어린 구성원인 아이에게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아이가 요즘 무엇을 좋아하고 꿈꾸는지, 구체적으로 그 애 어디가 어떻게 얼마큼 예쁘고 신기한지 한참 수다를 떨다가 그가 무언갈 생각한다. 그러다 말을 툭 떨군다.
“너도 너무 j한테만 매달리지 마. 많이 컸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그건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던 참이었다.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뭐라도 배우고 좋아하는 거 찾아봐.”
그는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걸 계속해보고 싶다는 것도, 잘해보고 싶다는 것도 모른다. 내 글이 별거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알 리 없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대화. 우리는 서로 네가 뭐 그리 힘들고 뭐 그리 잘났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무심하고 못된 말들을 들을 만큼 들었더랬다. 물론 나도 지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더 벌라고, 왜 가진 게 없냐고, 왜 핸드폰만 보냐고. 신경질을 부렸을 테지.
그때 그 많은 대화 중에 정작 한 번도 그런 말은 해보지 못했다.
외롭지 않아? 좋아하는 걸 찾아봐.
그 대신 그 시절에 우리가 서로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죄책감이었다.
내가 그를 가장 물어뜯고 싶었을 때도 내게 죄책감을 줄 때였고 나 또한 가장 사나운 방식으로 그에게 그걸 돌려주고 싶어 했다.
나에게 좋은 아내도 좋은 엄마도 아니라고 말할 때, 아무 재능도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 그는 한번 말했지만 나는 스스로 백번을 다시 말했다. 말이 반복될수록 나는 이미 능력 없고 도움 안 되는 못난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버렸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도 밉고 그도 미웠다.
그도 똑같이, 내 말들을 되뇌며 나를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것은 용기 같은 것이다.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진다. 세시가 넘어선다. 그동안 나는 여러 번 우리가 만약 같이 살았다면 이런 대화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미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지는 땅바닥에 꽂히는 우리의 거친 말들은 통증만을 만들어 내었다. 자연히 말하지 않는 일이 늘었다. 가만히 두어도 갈라지는 마른땅을 두드려대는 것이 겁이 났다.
체념하듯 그만하자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이 별거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안심과 상대의 말을 듣고 믿고 헤아리는 포용은 별거하지 않았다면 결코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배우며 자라고 있다. 뒤늦게 누구도 다치지 않게 대화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