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별거’는 내 목구멍에 깊이 박혀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했고,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그러나 이 몹시 사적이고 예민한 일에 부단히도 개입한 사람이 있다.
엄마 인생의 주요한 키워드는 돈이었다. 돈에 매달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인생이었다. 아빠는 이십오 년 전에 안정적인 직장을 퇴사하고 각종 사업을 벌였다. 그때 우리 삼 남매는 모두 십 대였다. 아빠의 헛발질로 가세가 기울자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가게에 딸린 쪽방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아빠는 뭐든 잘해보려고 할수록 더 크게 실패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아빠의 실패에 따른 빚과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배우자였다. 그러니까 엄마가 자나 깨나 돈돈돈 하게 된 것은 돌아서면 먹이고 가르쳐야 할 자식들과 불어나는 빚 때문에 생겨난 안타까운 강박이다.
대학 시절부터 내게 남자 친구가 생기면 엄마는 무엇보다 그가 얼마나 가진 집 아들인지 알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대기업 다닌대, 하면 단박에 차장인지 부장인지 알아 오라고 했고 집안이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싶으면 나를 따라다니며 끝이 없는 잔소리를 했다. 왜 꼭 만나도 그런 애들만 만나냐, 수준을 높여라, 헛똑똑이다. 나는 무시하고 대들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 말들을 훌훌 털어내지는 못해서 엄마가 반대하는 아이는 제대로 사귈 수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결혼만은 꼭 돈 많은 남자랑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평생 돈에 볶인 엄마의 운명을 내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돈의 부족과 필요와 갈망과 압박에 시달렸던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별거를 시작하고 나는 대출을 받았다. 당장 생활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대한도라는 천만 원을 쥐고 아끼면서, 그러나 아이에게는 부족하지 않게 쓰며 생활했다. 예쁜 옷을 사 입히고 유기농 식재료를 샀다. 그런 것들은 비싸다기보다는 양이 적었으므로 내가 덜 먹으면 그만이었다. 마냥 놀 수는 없어서 온라인으로 유아복을 몇 가지 판매했고, 수학 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수업하며 약간의 돈을 벌었다,
나는 무엇보다 엄마처럼 될까 봐 겁이 났다. 남편이 없고 돈도 없는데, 적게 버는 돈으로 아껴 생활해야 하는데, 돈은 어떡하지, 앞으로 어떡하지, 그 막막함이 구름처럼 덮칠 때 나는 자꾸 딴생각을 했다. 그 무게와 어둠에 깔리면 나도 어느새 돈돈돈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우리 딸이 그런 나를 보고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가 딴생각을 하면 엄마는 팔자가 좋구나, 했다. 이 와중에 책도 보고 놀이공원도 간다고, 남편 내쫓고 속도 좋다고, 신기해하며 조롱하며 타박했다. 가끔 엄마는 다짜고짜 울기도 했다. 불쌍하고 기막히다고. 나도 그렇지만 본인의 팔자도 너무 가엾다고. 엄마 친구가 사위에게 큰 용돈이라도 받았다는 자랑이 들리면 그 타령은 더욱 구슬퍼졌다. 나는 이미 책을 보며 울고 놀이 기구를 타며 울고 난 뒤라 담담했다. 나는 이 와중에 속 좋고 싶었다. 흔들리는 것이 있다면 보이지 않게 하고 싶었다. 늘 작은 목격자가 예의 그 투명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처량해지는 것 또한 엄마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그랬다.
나는 엄마와는 다르게 돈이 없으면 없을수록 돈에 초연해졌다. 큰 빚도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밥을 못 먹어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씩 벌고 조금씩 아끼고 공부는 내가 가르치고 하는데 까지 해보자, 매일 다짐했다.
아이 아빠가 새로운 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돌아왔을 때, 순순히 양육비를 주겠다는 말을 꺼낼 때까지 나는 뭘 달라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아이를 잊지 않고 찾아와 그 애의 상실감을 달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내 아빠의 무책임과 무관심을 보고 자라서일까. 내게는 부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사람의 책임감은 강요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내가 요구하고 의지하기에는 이미 너무 완벽한 타인이었다.
나중에 그가 지나가는 말로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돈 달라는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냐고. 나는 대답했다. 없어서 못 주는 거겠지 생각했어. 그는 약간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적개심과 억울함을 가질 정도로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그가 없는 일상에 적응하고 싶었다. 원망하는 대신 삭제하고 싶었다.
그에게서 지급되는 양육비는 지난 오 년 간 조금씩 늘어 지금의 적지 않은 돈이 되었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할 때마다 나는 호봉이 오르는 것처럼 기분 좋았다. 가장 좋은 것은 돈에 대한 초연함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돈 말고 다른 것들을 품고 살고 싶었다. 사랑이나 꿈, 몽상, 연민과 기쁨, 아름다움을 찾는 눈, 마음에 응답하는 마음과 같은 부드럽고 돈 안 되고 것들을 쫓으면서 살고 싶었다.
엄마를 보며 가진 반감과 꾸준히 오른 양육비 덕에 나는 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무심해질수록 가까이 오는 것은 비단 사람만은 아닌지 나는 아주 큰 고난 없이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다만 그것이 나의 순수한 노동으로 인한 벌이가 아니라는 점은 문득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준다. 불로소득과 무임승차, 잉여 인간과 기생 본능이 나를 가리키는 말 같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드물게 육아의 수당을 제대로 받는 운 좋은 양육자’라고 여기려 한다.
온통 돈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진 엄마의 인생에 나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엄마의 노동과 악착으로 그리 서러운 일 없이 먹고 배운 자식 중 하나이며, 십 대에는 방황하다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대학을 6년 다녔다. 내가 엄마 친구들의 딸들처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살아왔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데에 취직해 서둘러 돈을 벌었다면, 이윽고 결혼 생활마저 풍족하고 순탄하게 이어갔다면, 그리하여 엄마에게 지워진 경제적 부담을 나누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었더라면 엄마는 지금의 엄마와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삼 남매가 삼등분으로, 그중 나는 조금 더 큰 지분으로, 그가 쪽잠을 자면서 빨간 눈으로 돈을 벌게 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포를 심어주었으므로 엄마와의 잦은 갈등과 가끔은 뜯기는 듯한 상처를 받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래 왔다. 엄마는 때때로 깜박했다는 듯이 나를 찌르고, 나는 가만히 찔리지만은 않고 되받아치거나 무시로 대응하고. 그러다가도 엄마는 문득 나에게 유일하고 따뜻한 위안을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우리는 한낮에 각자의 집구석에 앉아 미루고 미룬 얘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엄마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느라 팔이 아프다고 투정하면서도 통화를 그만두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몇 년 동안 반복했던 이야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 것 인지에 대한 이야기. 돈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엄마의 연설, 타박, 푸념. 내 어디가 얼마큼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래도 오랜만이라 나는 그 지겨운 대화가 조금은 그리웠던 모양인지 적당히 넘기고 적당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좀 울었다. 엄마와 얘기하다 보면 그렇다. 말로는 다 좋다고 하면서도 헤치고 걷어내면 그 안쪽에 얼룩 같은 억울함과 두려움을 보게 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문제인가? 나는 잘못되었나? 나는 울고 엄마는 가만히 듣는다.
“... 너는 새로운 가족으로 살고 있어.”
그건 엄마에게 듣기 어려운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문어체이고 혼잣말이며 엄마의 가장 최근의 결론이었다.
나는 칭찬받은 것처럼 뿌듯했다. 새로운 이라는 낱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있다. 새로운 것에는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 실패의 가능성과 막막함이 있다. 새롭기 위해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그것들로 인해 종종 위태로워지는 것까지도 당연하다. 당연하므로 별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