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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Mar 23. 2023

부뚜막 고양이(2)

어느 날인가 어김없이 골목을 배회하던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이 불자 아무 상가 건물에나 우르르 들어가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모여 앉았다. 어둑한 그곳에서 수다와 놀이가 이어졌다. 계단참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나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다가 그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쓰러뜨렸다. 그러자 병이 요란하게 구르기 전에 얼른 집어 제자리에 세우는 아이가 있었다. 왁자지껄한 와중에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피식 웃고는 또 다른 병을 밀어 쓰러뜨렸다. 그 애는 나를 힐끔 보고는 웃음이 삐져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또 병을 세웠다. 나는 또 병을 넘어뜨리고 이번에는 소리 내 웃었다.


나의 최초의 연애는 그런 장면으로 남아있다. 마음이 간질간질해 무슨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아이와 그 장난에 웃음을 깨물며 장단을 맞춰주는 아이가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빈병을 넘어뜨리고 일으키며 우리는 마치 서로에게 직접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나란히 달아올랐다.


가끔 대문 앞의 우체통에서 엄마는 마름모꼴로 접은 편지를 발견하고는 했다. 좋아해 사귀자 따위의 말을 휘갈겨 쓴 장난스러운 연애편지다. 내가 아닌 다른 가족이 받으면 뚝 끊기는 전화가 빈번해졌다. 가족들이 그런 전화에는 나를 꼭 흘려보아서, 나는 전화벨이 울리면 총알같이 튀어가 수화기를 사수해야 했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집 앞에서 아이들이 내 이름을 노래처럼 불렀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엄마 의 등 뒤를 살금살금 지나 신을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빽하고 지르는 고함을 현관문으로 틀어막고는 신나게 계단을 뛰어내려 가는 내게 부뚜막 고양이 운운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집 대문을 열면 한 무리의 친구들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그 애도 서있다. 나를 못 본 척 하지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우리는 골목과 공터를 순회한다. 그 애와 나는 무리가 이동할 때마다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어 몇 걸음 처진다. 발은 저절로 아이들을 따라 가지만 눈길과 마음으로 살짝살짝 서로를 건드려 본다. 손도 잡지 않고 어깨도 두르지 않고 말도 없이, 달리 할 게 없으니 발걸음이라도 맞춘다. 내가 왼발을 내밀 때 그 애도 왼발을 내밀려다가 발이 꼬인다. 나는 그게 뭐가 그리 우습다고 배를 쥐며 깔깔 웃는다.


열세 살이 되자마자 나는 그 애와 손을 잡았다. 비워진 친구집에 여럿이 놀러 가 전기 놀이를 할 때였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둥근 원으로 앉아 옆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그 위에 이불 한 장을 덮는다. 이불에 감춰진 손을 꽉 쥐어 전기를 보내면 옆으로 전달 전달, 그러다 전기 발생의 근원지를 맞추는 그런 방식의 싱거운 놀이였다. 이 놀이의 목적은 전기의 방출자를 맞추는 데 있지 않고 옆 자리의 아이와 손을 잡는 데에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당연스레 그 애의 옆자리에 앉았다. 얼결인 척했지만 계획적이었다. 게임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처음 손이 겹쳐질 때부터 전기 같은 것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두 개의 손이 축축해져 갔다. 그 애가 아귀에 힘을 줄 때마다 나는 정말로 가슴까지 찌릿했다. 아직 힘도 마음도 조절 못하는 초보 연애자들이었다. 작은 방안이 이미 여럿의 체온으로 후끈한 데다 이불까지 덮어서 우리는 사우나에 앉은 사람들처럼 더웠다.  누가 감전되기 전에 물기 어린 게임은 끝났다. 그 애는 놓인 자신의 손을 잠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애의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고백을 열 번쯤 받은 사람처럼 황홀했다. 연애가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인지를, 너무 달아서 어쩔 때는 순간 몽롱해지기까지도 한다는 것을, 나는 열세 살에 알았다.


그때쯤 나는 또한 ‘일진’을 알았다. 학교에서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한 무리를 보며 아이들이 그렇게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 애들은 예쁘거나 키가 크거나 신발을 브랜드로 신거나 축구부거나 시도 때도 없이 선생님한테 혼나는 애들이었다. 모두가 걔들을 주목했고 관찰했다. 부러웠거나 미웠거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급속도로 그리고 무분별하게 성에 대해 감춰진 진실들을 하나 둘 알아차리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일진들을 향한 확인되지 않는 성추문도 파다했다. 내 기억에 그 이야기들은 선정적이었다. 체육창고에서 혹은 어느 밤 교실에 숨어들어 저희들끼리 비밀스러운 어른의 짓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작 본인들은 그런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관심과 인기의 증명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소문을 전해 들을 때 입을 틀어막으며 설마 하는 눈빛으로 괜히 부끄러하면서도 깊은 저곳에서 은근히 부러운 마음이 솟는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나도 일진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에 예쁘지 않았고 키도 작았고 공부도 꽤 잘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면 아쉬운 대로 일진은 아니어도 잘 노는 유명한 아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나름의 가능한 일탈을 했다. 골목을 배회하는 짓에 더해 귀가 시간을 더욱 늦추고 친구들과 틈만 나면 뒷산 초입에 있는 공터에 놀러 가 별로 하는 짓도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이었다. 엄마는 부뚜막에 오르는 고양이에서 ‘날라리’로 내 별칭을 바꾸었다.


어느 날 공터에서 일진 무리를 만났을 때 그중 한 아이가 나를 보더니 손짓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주섬주섬 다가갔다. 그 애가 빙긋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척 올리더니 귀에다 속삭였다. “너 김일우한테 가슴 보여주고 사귀는 거라며?” 일우는 나랑 전기가 통한 그 애 이름이었다. 머릿속에서 쩍 하고 무엇이 쪼개지는 것도 같았다. 순식간에 눈앞에,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티셔츠를 걷어 올려 봉긋한 가슴을 보여주는 내가 보였다. 그런 적 없다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다만 얼굴이 빨개져서 “누가 그래?”라고 물었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일우가 직접 그런 헛소리로 나를 나조차 상상 못 한 사람으로 만든 것인지 그것이 가장 먼저 궁금했다. 일진애는 비실비실 웃으며 “김일우가 그러던데?”라고 답했다. 목구멍이 콱 막혔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어쩐지 그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을 것만 같았다. 그보다 내가 든 생각은, 어째서 가슴일까였다. 가슴으로 그렇게 사람마음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가슴이 뭐길래.


그 일의 진위는 결국 알 수 없었다. 나는 일우랑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그 애를 외면한 채로 졸업했고, 다른 중학교에 배정된 우리는 그 뒤로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날 근거 없이 확신한 남자들의 유치함과 비열함과 지질함은 이후 수많은 연애에서 버리지 못한 옅은 선입견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치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란 한없이 약한 구석 하나쯤은 있다고 믿는 것처럼, 남자들도 한없이 비겁한 얼굴 한쪽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 때문인지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의 그 숨겨진 얼굴을 나는 보게 된다. 내 연애는 번번이 그들이 그 얼굴을 드러낼 때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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