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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Mar 20. 2023

부뚜막 고양이 (1)

나는 비행 청소년이 될 여지가 다분한 어린이였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나를 시샘과 불만이 가득하고 감정 기복이 심했던, 다루기 힘든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나와 가족들의 기억은 대부분 엇갈리고 드물게 일치한다.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각자의 해석이란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겪은 게 아닌가 싶게 판이하다. 이를테면 열 살 즈음의 나와 새 옷에 대한 기억.


당시는  두 살 터울의 자매에게 새 옷을 공평하게 사주는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매번 언니가 새 옷을 사면 헌 옷을 물려 입어야 했다. 나는 그때마다 울었다. 10대가 되고 외모에 점점 관심이 많아지면서 앙탈은 발악과 저항으로 거세졌다. 나는 뭐든 물려받는 것이 싫었다. 학용품과 가방, 신발, 머리핀 다 싫었지만 특히 옷은 더더욱 싫었다. 옷이란 것은 한 번도 빨지 않은 완전한 새 거일 때 태며 색이 가장 예쁘다는 것을 새 옷 입은 언니를 바라보면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새 옷은 새사람을 만들어 주었다. 새 원피스를 입은 언니는 빛이 났고 그의 헌 옷을 입은 나는 사이즈는 마침맞을지언정 그저 초라해 보였다. 그러니 나도 새 옷을 좀 사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는 1990년대 초반이고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딱 버는 만큼 쓰며 사는 자녀 셋의 5인 가족이었으므로 엄마는 내 요구를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내 새 옷보다 더 중요한 소비가 수두룩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밥상머리에서도 울었고 잠자리에서도 울었다. 더 이상 물려받은 옷은 입지 않겠다고 버티거나 언니보다 먼저 일어나 그의 새 옷을 훔쳐 입고 학교로 내빼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의 반항적 행태에 화가 난 아빠가 저녁 식사 중에 반찬통을 집어던지는 사태도 발생한다. 나는 김치국물 튄 옷을 입고도 울부짖었고 엄마는 ‘쟤 아니면 시끄러울 일이 없는 집’이라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 대한 가족들의 대우는 부당했다. 옷 물려 입기는 절약의 관습이 아니라 가족 구성한 한 사람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지표였다. 삼 남매 중 가운데, 영특한 언니와 허약한 남동생 사이에 끼인 나의 자리는 그렇게 헌 옷을 줄기차게 내려받으며 되새김되었다. 언니는 이미 만 5세에 백과사전을 줄줄 외워 명절마다 온 어른들에게 주목받는 집안의 자랑이었고, 미숙아로 태어난 장손의 남동생은 금보다 옥보다 귀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나는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었다. 시험 점수는 늘상 80점 언저리에 몸은 잔병 없이 건강했다. 그렇다고 친척들 앞에서 맹랑하게 춤도 노래도 할 줄 몰랐고 미술에도 체육에도 소질이 없었다. 딱히 뭐라고 특징을 꼬집어 말하기 애매한 애. 그게 나였으므로 집 안에서 내가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 미미한 존재 가치를 어린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관심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모래가루가 내 존재를 뒤덮어 가려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틈만 나면 버둥대고 고개를 빼들었다. 시선을 끌고 싶었고 대화의 주제가 되고 싶었다. 누가 뭐라도 나에게 질문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서 설명할 텐데. 내 이야기를 들으면 나를 사랑할 텐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의 관심은 언제나 원하는 양에 미치지 못했고, 부족한 양은 내 안에서 자체 생산된 서러움과 앙심이 채웠다. 나는 어려서 별것도 아닌 일에 곧잘 대성통곡하고는 했다. 왜 동생만 아이스크림을 주느냐고, 왜 언니랑만 시장에 가느냐고 나는 울었다. 엄마가 우뚝 서서 황당해하고 어려워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그저 유별나다는 말 뿐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엄마는 끝내 내 억울과 슬픔의 근원을 몰랐다.


한 번은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조르는 내게 엄마는 이번 시험에 반에서 1등을 하면 사주겠노라고 거래를 제안했다. 나는 욕망에 불타 난생처음으로 새벽마다 일어나 모두들 잠든 가운데 시험공부를 했다. 결국 전 과목(체육까지 지필 시험을 보았다)에서 단 세 개만 틀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반에서 단독 1등이었다. 엄마는 놀랐고 활짝 웃었고 지체하지 않고 나를 대동해 시장으로 가 노란색의 롤러스케이트를 사주었다. 는 환상적으로 기뻤다. 그런데 엄마가 내게는 아무 말도 없이 작은 사이즈 한 켤레를 더 사는 것이 아닌가. 동생의 것이었다. 공부도 뭣도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그 애가 그저 존귀함의 대가로 내가 며칠밤을 바친 노력의 대가와 동일한 것을 얻어내는 장면을 나는 허무함으로 지켜보았다. 이 사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저지할 수도 없었기에, 분란을 일으키면 수여물이 회수될까 두려워, 불만을 꼭 깨물었다.


가족 안에서는 번번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지만 사회생활은 좀 달랐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내 위치를 정할 수 있었다. 나는 사교성이 꽤 좋은 편이었는 데다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친구들 개개인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기억했고, 이것 저것 칭찬을 자주 했다. 문제 상황을 되도록 합리적이고 노련하게 조율했으며 안전한 위치에서 모두에게 신임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치밀한 계산으로 관계를 재조정했다. 친구의 부탁은 거절하지 않았고 그들의 복잡하고 유치한 사적 고민들도 성심으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친구들을 사랑했다. 그 모든 것들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받고 싶은 걸 하면 되었다. 나의 어린 친구들 역시 나를 좋아해 주었다. 그건 공평한 상호작용이었다. 자연스럽게 집보다는 밖에 머물며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매일 저녁 얼른 저녁밥 먹고 잠들어 내일이 되기를 바랐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집보다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집 밖이 나는 더 좋았다.


그때쯤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걸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스킨십도 고백도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남몰래 확신할 수는 있는 어린 마음 둘. 그즈음 나는 좋아하는 애가 포함된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매일같이 온 동네를 배회했다. 시시껄렁한 수다와 우격다짐과 놀림과 말다툼과 화해와 개그와 하소연들을 쉼 없이 쏟아내며 우리는 일상의 역사를 골목에서 써 내려갔다. 그리고 부지런히 힐끔거리다 종종 시선이 맞기라도 하면 달뜬 얼굴이 그림처럼 굳고 마는 서투른 연애자도 연애의 역사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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