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뒤의 마음

프롤로그

by seoro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라는 거짓말을 적어놓고 일기장을 덮었다. 밤이 날마다 짧아지고 있었다.


지난겨울에 나는 여러 공모전에 글을 보냈다. 끙끙대며 쓸 때는 끝나기만 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막상 무력감과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낙선할 거라고 장담하면서도 몰래 품은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 때문에 매일 서성이는 것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주 우울했고, 우울하니 게을러졌고, 게을러져 몸이 아팠고, 사춘기 기운이 심해져 가는 열두 살 아이와는 사사건건 갈등을 겪었다. 날은 날마다 춥고 뉴스에서는 연신 기막힌 일들이 벌어졌다.

겨울이 다 가도록 결국 내게는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골백번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도리 없이 무참해졌다. 그러니까 그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여러모로 몸과 마음이 고스란하기 어려운 날들이었다.


3월의 마지막 주말, 때아닌 눈이 내렸다. 서촌 책방 글 모임에 처음 간 날이었다. 이제 봄이지, 했던 마음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겨울 날씨는 당혹스럽고 매서웠다. 초행길을 서두른 탓에 아직 열리지 않은 책방 대문 앞에 서서 펄펄 내리는 눈을 맞았다. 고요한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잠시 다른 시간에 도착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원목 탁자에 모여 앉았다. 어디서도 이렇게 만나기는 쉽지 않겠다 싶을 만큼 저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다. 비슷한 거라곤 글쓰기를 좋아하는 마음뿐인 것 같았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단지 몇의 사람들과 느슨한 관계만 겨우 이어오던 중이었다. 새로운 환경이 어색해 탁자 끝에 앉아 숨 죽이던 나는 익숙한 장소를 벗어난 걸 후회하고, 그 후회를 곧 후회했다.

책 방에는 좋은 책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눈에 익은 걸 바라보니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몇 년 전, 책을 막 좋아하기 시작했던 무렵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어쩐지 내내 마음은 외롭고 쓸쓸했다. 어느 날 무심코 책장에 손을 뻗었다. 그저 갖고 싶어서 사놓은 책들이 오랜 시간 책장에 쌓여 있었다. 이런저런 책을 펼치자 이런저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자를 읽으면 소리가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얘기를 가만 듣는 일이었다. 그게 좋았다. 더는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허기진 사람처럼 한동안 줄곧 읽기만 하다가 어느 날은 나도 주섬주섬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글자로 새겨지는 내 목소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어느 아침의 슬픔, 어느 저녁의 기쁨 같은 거였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자꾸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잘 쓴 글이 갖고 싶었다. 갈수록 이래저래 모양을 부리고 멋진 장식을 덧붙였다. 그러면 나중엔 내 것도 남 것도 아닌 이야기가 만들어지곤 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는 그러면서 다 잊어버렸다. 너무 잘하고 싶으면 도리어 놓치는 것이 있다.

실은 낙선의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다. 지난겨울 내가 쓴 것들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마구 덧칠된 수채화 같았으니까. 물먹은 종이는 울퉁불퉁하고 온통 혼탁한 색으로 뒤덮여 있는. 거기에 내 목소리는 없었다.


책방에 둥글게 앉은 낯선 이들이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목소리 하나가 시작되면 여럿의 어깨가 기울었다. 듣는다는 건 가만 읽는 일과도 비슷한 모양이라 귓가에 목소리가 솔솔 울리자 좋은 책이 시작될 때처럼 마음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글 모임에 다녀온 날 저녁,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에 긴 일기를 썼다.


‘분명 3월의 눈송이를 소복이 맞고 왔는데 어쩐지 봄에라도 다녀온 것 같다. 문득, 줄기차게 흐르기만 하는 시간에 계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숨어들기 좋은 계절과 되돌아오기 좋은 계절이 다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마침 지금 내가 '다시'라는 말에 언제라도 관대한 계절 앞에 있다는 건 또 얼마나 큰 다행인지.’


지난겨울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말 모르겠다. 영영 모른 척하고 싶다.

그저 나는 조그맣고 어리숙한 내 목소리를 종이 위에 다시, 새겨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