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바다

고요한 무대 위에 나를 올리다

by 서해

바다의 주인공은 늘 파도인 줄 알았다.

살랑이는 물결부터 성난 파도까지,

요란한 소리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존재.

파도 없이는 수영도 서핑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개에서

파도가 물러간 바다를 보았다.

고요해지자 오히려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모래 위를 바삐 움직이는 소라게,

고운 모래결, 먹이를 찾는 갈매기,

모래놀이에 몰두한 가족들까지—

모두가 주연이었다.


마흔 즈음, 나는 종종 주변인처럼 느껴졌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

가끔은 엑스트라 같았다.


그 감정을 처음 마주했을 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여전히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그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많은 동료들이 사십 대에 이르러

같은 감정을 토로했다.


성과와 무관한 평가,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는 자리.


회사라는 무대는

본래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바다에서 파도를 걷어낸 것처럼,

내 삶에서도 나를 덮은 무늬를 잠시 걷어내 보았다.


그 아래엔 여전히 나만의 자원들이 있었다.


요리와 여행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며, 글로 생각을 정리한다.

복잡한 상황을 엑셀의 수식 하나로 단순하게 풀고,

난해한 개념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걸 즐긴다.


그런 소소한 능력과 취향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글쓰기는

나를 가장 단단히 지탱했다.


바다를 다녀오면 글을 썼다.

사진을 정리하고, 동선을 되짚고,

그날의 햇살과 바람의 결을 눌러 담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글은 내 루틴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여행보다 글을 더 즐기고 있다는 것을.


바다는 순간이지만,

글은 그 순간을 더 오래 머물게 했다.


회사에서도 글쓰기는 내 곁에 있었다.

보고서를 닫고 잠시 틈이 나면

워드를 켜고 나의 글을 두드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숨구멍이 열리듯 숨이 트였다.


지겨운 회사 생활도, 지치는 육아도

“이 순간을 기록해 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나는 연출자이자 작가로 변했다.


글을 쓰는 그 시간,

나는 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오늘도 다시 노트를 펼친다.

나를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글은 내 바다였다.

출렁이는 감정과 떠도는 생각들을 받아주는

넓고 깊은 바다.


그 위에 앉아, 나는 나를 정리하고

다음 항해를 준비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