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나의 비밀

케르겔렌 군도 — 장 그르니에 《섬》

by 서해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 그르니에, 《케르겔렌 군도》


그르니에는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비밀’을 지닌 채 살아가길 바랐다.

그에게 비밀은 숨김이 아니라,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이었다.


세상이 끊임없이 나를 정의하고

누군가의 이름이나 역할로 규정하려 할 때,

그는 도리어 자신 안의 고요를 지켜내려 했다.

오히려 남루함 속에서만

비밀이 온전하게 지켜진다고 믿었다.


바다도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바다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내가 누구냐고.

나는 드러내지 않음이 더없이 편안하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 장 그르니에, 《케르겔렌 군도》


달이 한쪽만 비추듯,

우리도 세상에 단 한 면만 내보이며 살아간다.

보이는 삶은 빛나지만,

보이지 않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지탱한다.

그르니에의 말처럼,

정작 중요한 건, 그 가려진 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보이려 한다.

직급과 역할, 성취와 일상까지—

노출의 대가는 더하기보다

결국 빼기가 더 크다.


나는 바다를 여행하며 배운다.

눈앞의 풍경보다,

보이지 않는 리듬에 더 귀 기울이는 법을.

반짝이는 수면 너머,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생명들을 상상하며.


이제 나도 ‘보이는 나’보다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끌린다.

꺼내놓지 않은 말, 보여주지 않은 감정—

그 모든 이면이 나의 진짜 얼굴이다.


바다를 오래 바라보면

표면의 빛이 아니라, 그 속의 어둠이 보인다.

그 어둠이 있기에 물결은 깊고,

그 깊이 덕에 빛은 더욱 또렷해진다.


여행은 ‘보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일’이다.

무구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바다는 나의 비밀을 지켜 준다.